블록체인 업계에서는 종종 유명 대기업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어떤 코인은 삼성이 비밀리에 만든 것이라는 둥 어떤 코인은 현대그룹의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는 둥 대체로 엉터리 코인을 팔기 위한 헛소문이다.

그런데 진짜 암호화폐를 발행한 대기업이 등장했다. 한국 대표 IT기업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이다. 도쿄증시에 상장된 라인의 시가총액은 약 1조엔, 우리 돈으로 10조원이 넘는다. 암호화폐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상황에서 대기업이 암호화폐를 발행한 것은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다. 라인은 현재까지 세계에서 암호화폐를 발행한 기업 가운데 가장 큰 기업이라는 기록을 얻었다.

라인은 지난 8월31일 자체개발 암호화폐 ‘링크(LINK)’ 발행을 공식 발표했다. 링크는 라인이 제공하는 특정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가로 제공되는 ‘사용자 보상(user reward)’ 개념을 적용한 암호화폐다. 링크와 연계된 댑(dapp/분산형 어플리케이션) 서비스에 가입해 활동하면, 서비스에 참여한 사용자는 미리 정해진 보상정책에 따라 링크를 얻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링크 분배가 시작된 서비스는 라인이 지난해 7월 싱가포르에 문을 연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박스다. 라인은 지난 4일부터 비트박스에서 암호화폐를 거래하는 사용자들에게 거래금액의 0.1%만큼에 해당하는 링크(1링크=$5 환율 적용)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라인은 앞으로 링크를 얻고 사용할 수 있는 댑을 순차적으로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링크는 앞으로 출시될 라인의 댑 뿐 아니라 콘텐츠, 게임 등 다양한 서비스에서 지불 및 보상 수단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사진=라인 제공



포인트가 아니라 암호화폐인 이유


사용자 보상이라고 하면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포인트 혹은 마일리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라인도 이미 라인포인트를 운영하고 있다. 그럼 기존 라인포인트와 암호화폐 링크는 뭐가 다를까?

사용자 처지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암호화폐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치가 변동하고, 거래소에서 사고 팔 수 있다는 점이다.

링크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링크를 얻기 위해 라인의 댑을 사용한다. 링크의 가치가 높아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링크를 얻기 위해 라인의 댑을 사용한다. 사용자가 늘어나면 댑 서비스는 더욱 활성화되고, 이는 다시 링크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암호화폐가 새로운 사용자를 끌어들이고, 이들을 충성 고객으로 묶어두는 강력한 유인이 되는 것이다.

2012년 출시된 유명 블로그 서비스 미디엄(medium.com)과 2016년 암호화폐가 적용된 블로그 서비스 스팀잇(steemit.com)의 초기 성장과정을 비교하면 암호화폐가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는게 라인 쪽의 설명이다. 라인 관계자는 “서비스 출시 초기 2년 성과를 비교해보면 스팀잇이 미디엄보다 2배 많은 사용자를 확보했고, 사용자들의 콘텐츠 기여도도 2배 가량 높았다. 암호화폐는 새로운 사용자를 확보하는 강력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링크와 같은 암호화폐는 포인트보다 주식과 더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라인의 서비스 생태계가 성장하면 링크 보유자들이 그 과실을 나눠갖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삼성전자 주식을 갖고 있는 개미 투자자가 삼성전자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발행과 분배 구조가 잘 설계된 암호화폐는 보유자들이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해당 암호화폐가 적용된 블록체인 플랫폼의 가치를 높이는 활동을 하도록 유인한다는 점에서 주식과는 또 다르다. 언뜻 주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암호화폐의 이런 성격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금융당국이 암호화폐를 주식과 같은 잣대로 규제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주목하는 스마트계약


암호화폐는 흔히 ’프로그램할 수 있는 돈’(programmable money)이라고도 불린다. 미리 정해둔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적으로 암호화폐가 이체되도록 코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블록체인의 ‘스마트계약’(smart contract)이라는 기능이다.

사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아니어도 이런 코딩은 이미 흔하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특정 이벤트 참여자들에게 포인트를 나눠준다거나, 온라인 게임에서 어떤 미션을 수행하면 게임포인트를 지급하는 것 따위 말이다. 스마트계약이 특별한 것은 탈중앙화, 분산화를 특징으로 하는 블록체인 기술 덕분에 서비스 제공자가 사용자 몰래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게임회사들은 게임포인트 혹은 게임 아이템을 나눠주는 규칙을 사용자들 모르게 마음대로 변경해왔다. 하지만 복수의 네트워크 운영자 혹은 모든 사용자들에게 모든 데이터가 투명하게 공개되는 블록체인 안에서는 남몰래 제멋대로 규칙을 변경할 수 없다.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아도, 계약 이행을 감시하고 강제하는 중앙 관리자 없이도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암호화폐와 스마트계약 덕분에 개발자들은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 암호화폐로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고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인할 수 있는 다양한 보상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사용자들은 서비스 제공자한테 사기를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없이 안심하고 계약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경제 현상, ‘암호경제학’(Crypto Economy)의 등장이다. 최근 하버드대학의 올리버 하트, 에릭 매스킨 교수와 런던정경대학교의 크리스토퍼 피사리데스 교수 등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줄줄이 블록체인 스타트업 고문으로 합류한 것도 이 새로운 경제현상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이데자와 다케시 라인 대표이사. 사진=라인 제공


암호화폐, 거래소, 댑 3박자 갖춘 라인의 도전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대만의 국민 메신저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 라인의 월간 활성 사용자는 약 2억명이다. 현재 전세계 메신저 서비스들 가운데 8위를 차지하고 있다. 왓츠앱, 페이스북메신저처럼 전세계적으로 사용자를 확보한 서비스들과 위챗, 큐큐모바일 등 중국을 주름잡는 서비스들이 한참 위에 있다. 라인의 블록체인은 이들을 겨냥하고 있다.

라인이 블록체인 자회사 언블록을 설립한 게 지난 4월이다. 블록체인 사업을 본격화한지 불과 5개월 만에 암호화폐, 거래소, 댑을 모두 갖췄다.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전략이다. 블록체인 기반 광고 서비스를 추진중인 애드포스인사이트 홍준 대표는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일인데 라인은 서 너 가지를 동시에 진행했다. 시장을 선점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도전의 성패는 링크의 가격에 달렸다. 라인은 이달 안에 링크를 자체 거래소 비트박스에 상장할 계획이다. 총 10억개의 링크를 순차적으로 발행할 예정인데, 8억개가 사용자 보상으로 분배되고 나머지 2억개는 라인이 예비비로 갖는다. 지금은 라인이 1링크를 미화 5달러로 환산해 분배하고 있지만, 거래소 상장 이후 링크의 가격은 시장이 결정한다. 가격이 폭락하면 링크를 이용한 신규 사용자 확대는 기대하기 힘들다.

링크의 가격이 유지되거나 오르려면 링크로 이용할 수 있는 댑과 서비스들이 사용자들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라인이 이미 메신저뿐만 아니라 뉴스, 게임, 동영상 생중계, 쇼핑, 결제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링크 분배를 시작하자마자 그동안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던 거래소 비트박스의 거래량이 순식간에 세계 5위까지 치솟았다. 링크 발표 직후 라인은 전환사채 발행을 통해 1조5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좋은 신호이긴 하지만 사상 초유의 실험인 만큼 결과를 장담하긴 어렵다. 당분간 전세계 블록체인 업계가 링크의 가격 추이에서 눈을 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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