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식당에서 만난 마이클 케이시. 2박3일 일정의 첫 한국 방문을 마치고 다음날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고경태

 

책 제목에 머리가 흔들렸다.

좋은 의미만은 아니다. 헷갈렸다는 말이다. 늘 머리 속에서 단어가 엉켰다. “블록체인 현상? 아니 비트코인 현상? 비트코인 2.0? 블록체인 2.0?” 안스러운 기억력 탓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지인들에게 이 책을 추천했다. 블록체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거대한 ‘공부 숙제’다. 들어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들에게, 사기와 도박으로 치부하며 말을 자르는 이들에게, 그것이 진정 우리의 보편적 미래가 될 것인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이 책을 권하곤 했다. 책 제목을 바로 대지 못해 조금 머뭇거렸지만 곧 핸드폰 검색을 통해 찾아냈다.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미래의 창)

영어판 원제목은 <<The Age of Cryptocurrency>>다. 직역하면 ‘암호화폐의 시대’. 영어판은 2016년 1월에, 한글판은 2017년 7월에 1쇄를 찍었다. 책을 펴낸 미래의 창 관계자는 “한국 독자들에게 비트코인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진 터라, 한글판 제목을 바꿨다”고 말했다.

주변에 이 책을 전파한 이유는, 나 스스로 꽂혔기 때문이다. 작년에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에 관한 수십권의 국내외 저서가 국내에서 출간했지만, 깊이와 현장감을 동시에 지닌 책은 흔치 않았다. 이 책은 발군이었다. 기자인 2명의 지은이는 한글판 서문에서 “우리는 비트코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고 싶었으며 또한 비트코인 번영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책은 500쪽 가까이 두툼하다. 그 속에서 비트코인의 서사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지은이들은 현장과 인물에 다가가 질문을 던지고 분석을 한다. 비트코인의 시작, 커뮤니티의 태동, 블록체인의 형성, 골드러시, 해킹과 규제의 서막 등등. 르뽀르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역사책이라 할 만하다.

공동저자 중 한 명인 마이클 케이시(Michael J. Casey)에게 이메일로 서면 인터뷰 질문지를 보낼 때도 “당신의 책은 독보적이었다”고 썼다. “바이블에 가깝다”라는 표현도 했다. 돌이켜보니 조금 오글거린다. 피드백을 잘 받기 위한 과장이나 아부는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그는 올해 2월(한글판은 4월) 블록체인에 관한 책을 한 권 더 냈다. 기술의 진화에 중점을 둔 <<트루스 머신>>이다. 두 책 모두 마이클 케이시와 폴 비냐가 공동 집필했다. 둘은 <<월스트리트저널>> 동료였다. 마이클 케이시는 18년간 다우존스가 발행하는 <다우존스뉴스와이어즈>와 <월스트리트저널>에서 글로벌 금융과 디지털 기술 분야를 담당하며 칼럼을 집필하고 각종 방송과 팟캐스트에 출연해왔다. 그러나 2016년 첫 블록체인 책인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의 영어판을 낸 지 6개월만에 사표를 냈다. 현재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미디어랩의 ‘디지털통화 이니셔티브’(Digital Currency Initiative) 수석고문으로 일한다. 분산원장 소프트웨어 및 암호화폐 연구와 블록체인 실용화가 그에게 맡겨진 임무다. 더불어 뉴욕에 있는 블록체인 미디어 <코인데스크>의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마이클 케이시를 ‘열블나는 책과 사람’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모셨다.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곧 한국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0월 17~19일 서울신문사 주최의 2018 서울미래컨퍼런스 연사로 참석하는 2박3일 짧은 일정이었다. 한국 첫 방문이라고 했다.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번역자인 유현재 김지연씨 부부도 초대했다. 지난 10월18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한식당에서 마이클 케이시를 만났다. 그의 외모는 이름과 문체를 통해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다음 문답은 서면으로 오고 간 내용이다. 식사를 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은 문답 바깥에서 보충을 했다.


#태국 국경에서 버마 학생들을 취재하다


서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은 어떠했나.
“내가 자란 곳은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교외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서핑이나 크리켓, 오스트레일리아 풋볼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사실 퍼스에서 보낸 시절은 어딘가 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도무지 흥미를 못 느끼던 회계 감사 일을 하다가 마침내 떠나기로 마음먹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 뒤로는 여행하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 내 삶과 관심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퍼스에 산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미국 시민권도 지녔다. 덕분에 여권이 두 개다. 보통은 미국 여권을 쓰지만, 올해 초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블록체인 컨퍼런스에 참석할 때는 오스트레일리아 여권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미국-터키 관계악화로 미국 여권으로는 입국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을 발행하는 다우존스에서 일했던 것만 아는데.

“1990년 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때 많은 언론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태국과 버마(미얀마)의 국경인 카렌이란 곳의 난민 캠프에 버마 정권의 박해를 피해온 버마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이 학생들에 관한 기사를 쓰기로 결심했고, 결국 그것이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West Australian)신문에 내가 기자로서 쓴 첫 번째 기사가 됐다. (1991년에 퍼스로 돌아와 커틴 대학에서 1년 과정의 저널리즘 석사를 받았고, 이듬해부터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안>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아시아에 관심을 기울이며 취재하고 기사를 썼다. 이를 토대로 미국 뉴욕에 있는 코넬대학교에서 ‘아시아 연구’를 할 수 있는 로터리(Rotary) 재단의 장학금을 신청해 받게 되었다. 뉴욕에서 코넬대학교로 가는 도중에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아내가 될 여자를 만난 것이다. 코넬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아내와 나는 인도네시아로 이사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나는 <AFX Asia>라는 새로운 경제뉴스 매체의 자카르타 지국장으로 일했다. 2년 뒤 이번에는 아내가 학위를 마쳐야 해서 우리는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고, 나는 다우존스에 입사했다. 아내는 라틴아메리카를 공부해 인류학 석사를 받고 싶어 했고, 우리는 다우존스가 지국을 열 만한 곳을 골랐다. 우리의 선택은 아르헨티나였다. 나는 스페인어를 배워 아르헨티나로 갔고, 내 관심사도 아시아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옮겨갔다.”


 

언론인으로서 그의 첫 관심사가 아시아의 분쟁지역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88년 8월8일(이른바8888항쟁)은 버마 전역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난 날이다. 군사정권은 유혈진압으로 복수를 했고 2천명 넘게 죽었다. 버마-타이 국경으로 피신한 대학생들은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을 조직해 버마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카렌은 그들 중 일부가 머물던 버마 소수민족 해방구였다. 마이클 케이시가 태국에 있던 1990년은 이들의 무장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고향을 떠나 국경에 둥지를 튼 또래의 대학생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총을 드는 모습을 보면서, 저널리스트로서 첫발을 뗀 젊은이는 “왜?”라는 의문에 휩싸였을 것이다. 나는 버마보다 1년 먼저 한국에서 일어난 1987년 6월항쟁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만약 1988년 서울올림픽이 예정돼 있지 않았다면 1980년 광주에서 학살극을 벌인 한국의 군사정권도 1987년에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마이클 케이시는 나에게 1987년 6월 서울의 거리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최근의 한반도 평화 무드에 관심을 표명했다. 아시아에 터전을 둔 삶이 이어졌다면 서울 특파원을 자원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뉴욕의 한 바에서 우연히 콜롬비아대 학생이었던 여성을 만나면서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아시아에서 남미로! 아시아에 버마학생민주전선이 있었다면, 남미에는 체 게바라가 있었다.

 

# 체 게바라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 선호했을 것


당신의 첫 책은 <<Che’s Afterlife : The Legacy of an Image >>(체 게바라의 사후 : 이미지의 유산)이다. 2009년에 7월에 냈던데,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근무지가 영향을 끼쳤나?
“이 책은 체 게바라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체 게바라의 유명한 이미지에 관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게바라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나에게 영향을 끼쳤던 그의 정치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게바라를 둘러싼 도상학, 이미지, 그리고 그에 대한 숭배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은 사실 마케팅, 예술과 문화, 그리고 어떻게 의미의 정치가 자본주의에 의해 변질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내가 6년 반 가량 살았던 아르헨티나는 이 책을 쓰는 데 많은 자극을 주었다. 우선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아르헨티나 좌파 그룹의 많은 사람에게 민중 영웅이었다. 당시는 특히 아르헨티나 좌파가 다시 일어나던 때였다. 아르헨티나의 엄청난 금융위기로 인한 자각 속에서, 좌파 진영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노동청 바로 옆에 있는 다우존스 지국 사무실 밖에서 종종 시위를 벌이곤 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쿠바 사진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두 가지 색으로 된 체 게바라의 유명한 사진이 들어간 현수막을 들었다. 사무실에서 시위를 바라보던 나는 왜 다른 이미지도 많은데, 유독 이 이미지만 전 세계적으로 퍼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무엇이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인 힘을 그렇게 널리 퍼트리게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지금까지 쓴 책 다섯 권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체 게바라가 비트코인을 접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상상의 영역이지만.

“체 게바라는 아마 미국 달러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사유 재산의 축재를 인정하고 부를 어쩔 수 없이 균등하지 않게 나눈다는 점에 관해선 반대 했으리라고 본다. 사실 그는 아마도 단일 독점 결제 통화라는 개념을 모방한 대체 가능한 암호화폐보다는 탈중심화된 디지털 물물교환을 위한 대체불가능한 토큰을 더 선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돈은 자본주의의 수단이며, 자본주의는 악이라고 생각했다.”

마이클 케이시의 첫 책 <<Che’s Afterlife>>(2009.7). 쿠바 사진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1960년 찍은 체 게바라 사진의 복제 열풍 이면을 파헤쳤다. 본인의 저서 중 가장 좋아한다고.

 

마이클 케이시는 “자신은 체 게바라가 죽기 한 달 전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9일 볼리비아 차코의 작은 시골학교 교실에서(마이클 케이시는 이 곳도 방문했다고 한다) CIA의 지휘를 받는 볼리비아 정부군 하사의 총을 맞고 생을 마감했다. 나도 그해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1967년이 화제에 올랐다. 1967년 한반도엔 전쟁과 무한독재의 기운이, 남미와 유럽과 미국엔 혁명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전쟁과 혁명의 불꽃은 1968년에 이르러 가장 극적으로 타올랐다. 베트남 전장에서는 미군과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유럽과 미국에선 대학생과 여성과 흑인들의 민주화 요구가 세계를 흔들었다. 당시의 시위대도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현수막에 걸었다. 마이클 케이시는 앤디워홀의 팝 아트와 히피 운동을 이야기했다. 그의 정치성향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는 “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난 도널드 트럼프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도 덧붙였다. “나는 많은 비트코인 얼리어답터들보다는 훨씬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특별한 애착을 느끼는 자신의 저서가 <<Che’s Afterlife>>라고 했다. 전지구적으로 복제되었던 체 게바라의 유명한 사진 이미지가 인기를 얻는 배경을 탐구한 책이다. 그가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을 통해 비트코인의 탄생과 번영을 함께 한 사람들을 따라가며 질문을 던진 것처럼, 10여년 전에는 티셔츠에서 보드카, 심지어는 콘돔에까지 체의 이미지를 복제해 이용하거나 소비하는 사람들을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따라가며 질문을 던졌다.

 

#2013년, DCG그룹 베리 실버트와의 만남


언제 처음 비트코인에 관해 알게 되었나. 아마도 처음엔 회의적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 나도 처음에는 비트코인에 회의적이었다. 외환시장과 세계 경제에 관한 칼럼을 쓰곤 했기 때문에 비트코인을 접하게 됐는데, 우선 정부가 발행하지 않은 디지털 통화라는 낯설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흥미롭기는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비트코인을 그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철저히 무시했다. 탈중앙화된 디지털 통화의 가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달러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다소 일반적이되 딱히 통찰이라고는 담기지 않은 무색무취한 칼럼을 썼다. 그런데 그 칼럼을 읽은 크립토 세계의 몇몇 주요 투자자들이 다른 언론인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 나를 초대해 비트코인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 주었다. 비트코인이 은행의 중개 없이, 검열하기 어려운 장부에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 탈중앙화된 네트워크를 통해 거래를 기록하고 자금을 운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니 실로 비트코인이 엄청난 움직임이라는 점이 와 닿았다. 비트코인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혁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은 정말 무언가에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비트코인이 개발도상국에 미칠 영향도 짐작할 수 있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에 살아본 적이 있던 나는 기록을 관리하는 정부와 사회 사이의 신뢰가 약한 나라에서 비트코인이 가질 잠재적인 파급력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크립토 세계의 그 몇몇 투자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물었다. 블록체인 스타트업에 투자를 많이 하는 DCG(Digital Currency Group)의 창립자 베리 실버트와 크립토 금융그룹 서클(Circle)의 대표인 제레미 알레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가 2013년이었다. 비트코인을 ‘미친 사기’(Crazy Scam)라고 여겼던 그가 바뀌기 시작했다.

 

마이클 케이시가 쓴 나머지 책들. 왼쪽부터 <Unfair Trade>(2012.3), <The Age of Cryptocurrency>(2016.1, 공저), <Social Organism>(2016.1, 공저), <Truth Machine>(2018.2, 공저). <The Age of Cryptocurrency>의 한글판 제목은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이다. <Unfair Trade>는 불공정한 국제금융 질서와 세계화의 그늘을 다뤘다. <Social Organism>은 소셜미디어의 미래에 관한 책이다.

 

폴 비냐와 함께 두 권의 책을 썼다. 왜 폴 비냐였나.

“폴과 나는 가까이에서 일하던 동료였고, 비슷한 시기에 비트코인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같이 책을 쓰자고 먼저 제안한 쪽도 폴이었다. 아마도 내가 이전에 두 권의 책을 썼고, 그를 출판사에 있는 나의 집필 담당자에게 소개해줬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이디어를 논의하며 우리는 상당히 신이 났고, 같이 책을 쓰기로 의기투합했다.

폴은 함께 일하기 좋은 친구다. 매우 개방적이며 협업에도 적극적인 스타일이다. 같이 일하는 것이 익숙치 않은 사람에게는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는 나보다 다채롭고 상상력이 풍부한 글을 썼기에 아무래도 좀 더 분석적인 접근을 취하는 내게는 특히 꼭 맞는 짝이었다.”


 

두 사람이 책을 쓰며 역할분담은 어떻게 했는가.

“기본적으로 책을 나눈 다음 누가 어떤 부분을 더 잘 다룰 수 있을지 따져보고 그에 따라 각자 챕터를 맡아 초고를 썼다. 한 사람이 쓴 글은 가장 먼저 다른 사람이 꼼꼼하게 살펴봤는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기 전에 하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1차 편집 과정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나온 글은 우리 두 사람의 통찰력이 한데 녹아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닉 자보에게 사토시 나카모토를 물었으나…


두 권의 책은 생생한 현장감이 특징이다. 블록체인 산업의 비즈니스맨들과 개발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취재원들을 어떻게 챙기는가.
“그렇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블록체인 커뮤니티 사람들을 두루 알게 됐다. 자연히 그 가운데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게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항상 좋지 만은 않다. 관계가 너무 가까우면 기자로서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녹록치 않은 질문을 던지며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과정에서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또는 책을 통해 영감을 받은 학자나 사상가가 있는가.

“우선 내가 속한 MIT 미디어랩을 이끄는 조이 이토를 꼽을 수 있다. 조이는 내가 기술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MIT의 많은 사람이 기술뿐 아니라 그 기술이 작동하는 경제적 맥락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사람들은 ‘디지털 커렌시 이니셔티브’의 초대 디렉터인 브라이언 포드와 그의 뒤를 이은 네하 네룰라, MIT 슬론 경영대학원의 시몬 요한슨을 좋아한다. 나는 안드레아스 안토노폴로스의 비디오와 글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비트코인 세계에는 그 밖에도 똑똑한 사람이 정말 많다. 그 사람들 덕분에 나는 새로운 관점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조이 이토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지난해 7월 조이 이토와 제프 하우의 공저 <<9 : 더 빨라진 미래의 생존원칙>>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사회활동가이자 기업가, 벤처 캐피털리스트로서 일본에 인터넷을 보급한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MIT 미디어랩이 연구소를 되살릴 새 소장으로 조이 이토를 임명한 시기는 2011년. <<트루스 머신>>의 한글판 서문엔 이런 대목이 있다. “조이 이토는 비트코인의 초기와 인터넷의 초기가 매우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고,(중략)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MIT의 ‘디지털 통화 이니셔티브’다. 여기서는 암호학, IT, 금융분야의 저명한 교수 및 학생들과 포천 500대 기업, 전도 유망한 스타트업, 재력 있는 후원자들 그리고 정부 관료 등이 모여 새로운 ‘가치 인터넷’의 디지털 아키텍처를 디자인하기 위해 협업하고 있다.” 조이 이토는 2016년, 함께 일할 수석고문으로 동년배인 마이클 케이시를 불러들였다.

 

컴퓨터 과학자이자 법학도인 닉 자보의 관심과 사토시 나카모토의 관심은 하나의 뿌리에 있다.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에선 둘이 동일인일 수도 있다고 썼는데.

“<월스트리트저널> 편집국에서 우리에게 사토시 나카모토의 정체의 실마리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써달라고 계속해서 주문하던 언젠가, 닉 자보에게 이에 관해 이메일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닉에게 답장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사실 누가 사토시 나카모토인지, 사토시의 정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케이시 MIT 미디어랩 수석고문이 2017년 미국의 한 블록체인 컨퍼런스에서 발표하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토큰 버블은 인터넷 3.0의 토대가 될 수 있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닷컴열풍을 목격했을 것이다. 지금과 비교하면 어떤가.
“우리가 닷컴 버블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척 많다. 버블이 발생하면 사회 전체적인 자본 재분배가 이뤄진다. 자본 가운데 상당 부분이 처음부터 실행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낭비되는데, 여기에 투자했다가 실패하는 투자자들이 결과적으로 자본 재분배를 촉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버블 때문에 자본이 낭비될 뿐만 아니라 버블 덕분에 더욱더 넓은 경제 각 분야에 자본이 투입되기도 하는데, 닷컴 버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당시 기술에 관한 수많은 분야에서 너도나도 투기가 횡행했는데, 고삐 풀린 듯 넘쳐나던 자본은 광섬유 케이블망, 대형 서버 회사, 스마트폰 기술 연구 등 인터넷을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에 투자됐다. 버블과 함께 이렇게 재분배된 자본이 결국 다음 번 혁신의 토대를 닦은 셈이다. 페이스북과 아마존, 구글 등 새로운 승자들이 등장해 지금 우리가 인터넷 2.0으로 부르는 세상이 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닷컴 버블 때 일어난 자본 재분배 덕분이다.

나는 크립토 버블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신중하게 준비했다고 보기 어려운 설익은 프로젝트에 실로 많은 돈이 낭비되고 증발해버렸다. 그러나 그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은 토큰의 분배를 통해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이들에게 돌아갔다. (다만 블록체인 인프라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일련의 아이디어와 커뮤니티를 위한 프로토콜, 그리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발전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자 모인 개발자들이 오픈소스 코드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오픈소스라는 것은 이 모든 코드가 공짜로 공개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토큰 버블에서 발행한 수많은 오픈소스 코드들이 미래의 탈중앙화된 경제를 세우는 거름이 될 저비용의 인프라 구조를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닷컴 버블이 인터넷 2.0의 토대가 됐던 것처럼, 토큰 버블은 인터넷 3.0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이도 있고,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도 있다. 또는 둘 다 이루고 싶어하기도 한다.

“나는 우선 세상을 바꾸는 데 더 관심이 많다. 그런데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부는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시스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혁신에 성공하면 그 대가로 이윤을 낼 수 있는 제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게 우선순위가 돼 모두가 이윤에 혈안이 된 곳에서는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이 분야의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산업은 당신의 예상치를 얼마나 뛰어넘어 지금 흘러가고 있는가.

“일단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라는 단어와 개념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개념이 이렇게 빨리 많은 사람의 일상적인 대화 주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쯤이면 누구나 쉽게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블록체인 기반 애플리케이션이 한두 개 정도는 나와서 사람들이 블록체인 하면 그 서비스나 프로그램을 떠올릴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이 전망은 빗나갔다고 볼 수 있다.”

<하편에 계속>

(번역 도움 및 감수 : 김현기 송인근)

 

열불납니다. 아니 열블납니다. 말고입니다. ‘열심히 블록체인 블라블라 준말이라고 해둡시다. 블록체인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관해 뜨겁게, 또는 냉철하게 기록하고 조망한 책들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책의 주인공도 만납니다. 이름하여, 열블나는 책과 사람! 책과 저자를 추천해주실 분은 k22@coindeskkorea.com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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