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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백서 10주년 릴레이 기고, 이제 해외 필자로 이어갑니다. 미국 <코인데스크>는 비트코인 백서 출시 10주년을 맞아 “비트코인 10년: 사토시 백서(Bitcoin at 10: The Satoshi White Paper)” 라는 제목으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업계의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을 전망하는 다양한 인사들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코인데스크코리아>는 이 가운데 흥미로운 글을 엄선해 번역,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백서 10주년 칼럼은 '사이퍼 펑크의 전설' 티머시 메이(Timothy May)와의 인터뷰입니다. 메이는 일찍이 공산당 선언을 본뜬 암호화 무정부주의자 선언(Crypto Anarchist Manifest)을 쓴 장본인입니다. 코인데스크는 비트코인 백서와 블록체인에 관한 화두만 던졌을 뿐인데 메이는 무려 30쪽에 달하는 서사시 같은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대부분이 현실에서 동떨어진 채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블록체인 업계를 향한 거침없는 비판과 쓴소리였습니다.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그의 생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코인데스크는 전문을 실었고, 코인데스크코리아도 전문을 대부분 그대로 옮겨 소개합니다. 칼럼 속 코인데스크의 질문은 메이의 답변을 정리하며 가상으로 대담을 나눈 것처럼 재구성한 부분임을 밝혀둡니다.

이제 비트코인은 적어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들어갈 확실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금융 분야에서 암호 기술의 발전에 비트코인 백서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저는 비트코인 백서가 나온 뒤 지난 10년간 이른바 '비트코인 현상'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몇 가지 흥미롭게 지켜본 것도 있었지만, 무척 당황스럽거나 우려스러웠던 일도 많았다고 정리할 수 있겠네요.

비트코인은 역사책의 앞부분에 들 자격이 충분합니다. 복식 부기(double-entry book-keeping, 거래할 때 주고받는 양 측면을 모두 기록하는 것) 이후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기술 개발이자 개념을 구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사토시가 정확히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거래소에 의무처럼 부과되는 고객파악제도(KYC), 자금세탁방지(AML) 규정, 신원 조회와 배경 확인 결과에 따라 계좌를 압류하거나 의심스러운 행위를 비밀경찰 같은 당국에 신고하는 법안 따위는 절대 사토시의 구상에 없었을 거라는 확신은 듭니다. 거버넌스나 규제, 블록체인 등 겉만 번드르르하게 포장된 온갖 개입과 정부의 간섭이 결과적으로 아주 엄격한 감시 국가, 모든 걸 문서로 만들고 관리하는 통제 사회를 구축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토시가 아마 이 상황을 지켜본다면 심히 안타까워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자신이 구상한 초기 비트코인의 모습을 구현해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 할 겁니다. 지금 비트코인을 둘러싼 우리의 상황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껏 이룩한 것들을 위대한 성과로 추켜세울 수도 없고요.

물론 비트코인과 비트코인에서 갈라져 나온 몇몇 알트코인은 처음 의도한 대로 기능하며 역할을 다하고 있어요. 비트코인을 사거나 채굴하는 방법이 체계적으로 구축됐고, 비트코인을 이용해 수수료를 덜 내고 송금하는 방법도 개발돼 실제로 비트코인 거래에 걸리는 시간이 몇 분 안쪽으로 줄어들기도 했으니까요. 중요한 건 이 거래를 관장하는 중앙의 권력이 없다는 것이겠죠.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고, 거래에 참가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가 없어도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다는 점 말이에요. 이제 비트코인을 취득한 뒤 몇 년이고 보관할 수도 있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았어요.

그러나 금융 시장에 불어닥친 비트코인이라는 쓰나미는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과 재앙을 초래하기도 했어요. 완전히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지식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갖은 실험이 무수히 실패했죠.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확실히 비트코인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스마트폰을 다루는 것도 아직 어색하신 부모님이 깃허브에 접속해서 최신 버전의 비트코인 코드를 사용하는 기기에 맞게 세부사항을 터미널로 조정한 뒤 내려받아 어렵잖게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세요? 굳이 부모님 세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비트코인은 여전히 널리 보급됐다고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보편화는 요원한 상황에서 제 눈에 더 들어오는 안타까운 상황은 한둘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은 자꾸 먹통이 되고, 온갖 해킹과 사기에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를 포장해 ICO를 한답시고 한몫 크게 건지려는 불나방들은 곳곳에 널렸습니다. 기본적으로 프로그래밍 자체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정말 중요한 비전을 실현할 야심찬 이들 가운데는 능력 있는 사람이 너무 없습니다.

비트코인 백서 10년을 맞아 인터뷰 처음부터 온갖 초를 치고 있는 것 같아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지금 상황은 완전히 엉망진창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사토시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정말 훌륭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이디어,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의 시작, 첫걸음에 불과했어요. 사토시조차 2008년에 소개하는 비트코인을 가리켜 신탁으로 받은 궁극의 정답 같은 것이 절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거든요.

 

사이퍼 펑크 진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당신과 비슷할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 아니면 반대로 비트코인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말하면 비트코인 백서에 담긴 아이디어가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을 비트코인 세계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실크로드(Silk Road) 같은 암시장에서 초기에 비트코인이 쓰이기도 했고요. 비트코인이 처음부터 "규제 당국과 조율을 거친" 상품이거나 "(제도권) 금융기관 인증" 상품이었으면 아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겁니다.

실제로 아마 기억하시는 분이 거의 없을 것 같지만, 한참 전에 금융기관들이 나서서 SET라는 프로젝트를 야심 차게 선보인 적이 있죠. Secure Electronic Transfer, 그러니까 안전 전자 결제 프로젝트로 금융기관이 보안을 책임진 프로젝트였는데, 혁신적인 요소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하나도 없는 그냥 어려운 법률 용어의 나열에 불과했죠. 사이퍼 펑크 진영에서는 당연히 거들떠보지도 않았고요.

사이퍼 펑크 가운데 이른바 암호 금융(financial cryptography)이라는 분야가 한창 뜰 때 그쪽 기술 개발에 몸담았던 이들이 몇몇 있기는 했습니다. 다만 데이비드 차움(David Chaum), 스투 헤이버(Stu Haber), 스캇 스토르네타(Scott Stornetta)를 비롯해 암호학을 학술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한 이들의 프로젝트는 사이퍼 펑크의 관심 밖이었어요. 이 프로젝트는 대개 암호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금융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우선순위가 아니었죠.

그러나 지난 10년간 이런 경향도 분명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세상으로 몰려들었고, 굵직굵직한 콘퍼런스가 거의 매주 열리다시피 하다 보니 다 따라가기 힘들 정도예요. 대부분은 2008~2010년 사이 시작된 비트코인 시대(Bitcoin Era)에 사이퍼 펑크에도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이겠지만, 어쨌든 비트코인 덕분에 암호화와 사이퍼 펑크의 역사도 새로 쓰인 셈이죠. 원래 사람들은 특히 단선적인 서사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토대로 역사를 바라보고 상황을 이해하기 좋아하잖아요.

미래는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지난날엔, 그러니까 벌써 꽤 오래된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약 10년 동안 저는 특히 감시 국가의 등장을 비롯해 많은 것에 대해 참 부지런히도 발품을 팔며 이야기를 하고 다녔죠. 암호화 무정부주의자 선언을 쓴 게 1988년이고, 1992년부터는 사이퍼 펑크 리스트를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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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비트코인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시는 것 같네요. 아니면 비트코인 현상을 주도하는 비트코인 커뮤니티의 태도와 인식이 사이퍼 펑크가 보기에 부족한 탓일까요?

맞아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비트코인이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이 그저 욕심만 가득해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며 "별을 따러 가자!"느니, "존버(HODL)만이 살길"이라느니 말도 많죠. 제가 지금껏 본 모든 허풍 중에 가장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아요.

가격이 터무니없이 오른 정도만 놓고 보면 사실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이 더욱 심각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비트코인 회사가 수백 개가 생겨나고, 수많은 사람이 비트코인 업계로 몰려들어 전문가를 자처하며 언론은 비트코인 관련 소식을 그야말로 쏟아내는 모습은 역사상 최악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비트코인 업계의 영웅 숭배 문화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입니다. 닷컴 버블 때도 이런 건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온갖 콘퍼런스에 백서, 보도자료에 언론이 너무 과도한 관심을 준다고 생각해요. 전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얄팍한 상술투성이거든요. 언론도 여기에 동참해 상황을 부추기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물론 각 기업도 기술의 실체가 무엇인지 별 고민 없이 일단 먼저 침 발라놓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도 같아요. 기본적인 아이디어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관련 특허를 수십 개씩 출원한 곳도 있죠. 가만 보면 그 가운데 1990년대에 한창 논의돼 이미 결론이 난 주제에 관한 것도 많습니다. 특허 당국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신청서들을 잘 걸러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진짜 많은 것이 걸린 상황에서 첨예한 법적 다툼이 일어나면 그제야 부랴부랴 특허 내용을 꼼꼼히 검토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요.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프라이버시 혹은 익명성을 지키느냐 아니면 고객파악제도(KYC)에 따라 거래 당사자의 신원을 중앙 권력이 일일이 확인하고 관장하느냐의 싸움입니다. "권력을 분산하는(decentralized), 무정부주의(anarchic), 개인 간 직접 거래(peer-to-peer)"냐, 아니면 "권력을 집중하는(centralized), 중앙의 승인을 받아야만 거래할 수 있는(permissioned), 권력이 뒤에서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느냐(back door)"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프라이버시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이퍼 펑크나 사토시, 다른 선구자들은 중앙의 승인이 없이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으며 거래 수단으로 돈을 주고받는 과정은 중개인 없이 개인 간에 직접 하는 방식을 고집해왔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법정화폐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죠.

돈을 지급하는 사람(buyer)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문제에 관한 한 생각이 가장 앞섰던 선구자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데이비드 차움을 꼽겠습니다. 예를 들어 큰 상점이 물건을 팔 때 누가 이 물건을 사는지 확인하지 않고 결제를 처리하는 겁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날 현실은 정반대죠. 월마트나 코스트코 같은 대형마트는 소비자들의 신원, 누가 무엇을 언제 얼마어치나 샀는지를 전부 다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죠. 경찰은 기업에 이 데이터를 돈을 주고 사거나 아니면 영장을 발급받아 열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절차는 나라마다 그 투명한 정도가 천차만별입니다. 영장 같은 것 없이도 중앙의 권력이 모든 이의 개인정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도 많습니다.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 무엇을 샀는지, 아니 무엇을 사려 했는지 공개되기를 꺼리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는 쪽 말고 파는 쪽의 프라이버시와 안전도 문제가 됩니다. 매매와 거래 정보를 손쉽게 추적할 수 있는 곳에서는 거래 당사자에게 위험한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법으로 피임이 금지된 나라에서 피임약이나 피임 기구를 파는 사람들은 누군가 거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장사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훼손이든 종교적인 국가에서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행위든, 정치적인 보복이든 이유야 얼마든지 가져다 붙이면 그만입니다.

디지캐시(Digicash)처럼 사는 쪽의 익명성을 강조하는 세력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이들,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통행료를 내는 운전자들의 신원이 자동으로 기록돼 누군가가 그 기록을 모두 관리하는 사회는 문제가 있죠. 하지만 실제로 어떤 발언이나 행위 때문에 권력의 검열과 추적, 박해를 받는 이들은 대개 사는 쪽보다는 파는 쪽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는 쪽과 파는 쪽의 경계는 사실 확연히 나뉘지 않습니다. 물건과 대금이 오가는 화살표의 방향은 수시로 바뀌곤 하죠. 사토시도 비트코인 백서에서 거래 과정을 추적하기 어렵게 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할 때 사는 쪽은 물론 파는 쪽의 익명성도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이론적으로 완벽하지 못했죠. 비트코인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뒤에도 이 문제는 사실상 진척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지=ErikaWittlieb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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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의 혁신을 모색하는 세력이라면 진정한 혁신을 가로막으려는 중앙의 권력과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지금 암호화폐를 둘러싼 이 모든 과정이 결국 또 다른 페이팔 같은 서비스나 좀 더 나은 은행 간 거래 시스템을 만드는 데 그치고 말 거라면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전혀 없죠. 핵심은 거래 과정을 장악하고 거래를 승인하는 게이트키퍼를 우회하고 말도 안 되는 수수료를 챙기는 중개인을 무력화하는 데 있습니다. 위키리크스에 기부하는 돈이 어디로 가서 어디에 쓰이는지 중개인이 도대체 왜 알아야 합니까?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돈을 보내고 받는 데도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규제 친화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암호화폐를 죽이려는 시도나 다름없습니다. 암호화폐를 페이팔이나 비자 카드의 아류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암호화폐를 규제의 틀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하고 싸워야 합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여기저기 막 적용하려는 상황도 대부분 규제에 따르는 것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하긴 생산 및 유통 과정의 모든 기록을 퍼블릭이든 프라이빗이든 블록체인에 저장하겠다는 것과 같은 이용 사례는 별 의미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급망을 따른 거래 내역을 분산원장에 기록하는 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그냥 데이터베이스를 백업해두는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하기도 했죠. 또한, 기업이 계약 내용이나 원자재 구매, 배송 일시 같은 중요한 정보들을 블록체인에 기록해 대중에 공개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안일합니다.

우리가 왜 처음에 비트코인에 열광했나요? 거래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우회함으로써 무력화하고, 실크로드 같은 시장에서 개인과 개인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거야말로 정말 멋진 일이고 진짜 혁신이죠. 페이팔의 아류를 만드는 데는 분산원장 기술이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이른바 상자 밖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미 아는 것에 새 기술을 접목할 궁리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뭐든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무 재미있어서 즐겁게 무언가에 매달릴 때 비트토렌트(BitTorrent), 믹스넷(mix-nets), 그리고 비트코인처럼 혁신적인 무언가가 나오기 마련이죠. 그래서 새로운 것을 적용해볼 방법을 열심히 궁리해보라는 표현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막연히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바꿔놓을 세상을 믿는 이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도전해서 혁신을 이뤄낼 거라는 예감이 들기는 합니다. 정해진 조직의 틀 안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는 기업에서는 아무리 해봤자 제대로 된 혁신이 나오진 않을 겁니다.

비트코인에서는 말이 곧 돈입니다. 수표, 양해각서, 배송 계약, 돈이 실제로는 오가지 않고 철저히 약속과 기록으로만 거래하는 하왈라(Hawallah) 은행은 모두 각기 다른 형태의 돈을 쓰고 있는 겁니다. 닉 자보(Nick Szabo)가 설명한 것처럼 비트코인이나 암호화폐를 금이라는 자산과 비교해보면, 금이 지닌 가치와 속성을 비트코인도 거의 다 갖추고 있습니다.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비트코인은 디지털에만 있으니 무게가 나가지 않고, 훔치거나 압류하기도 어려우며, 와이어로 연결만 되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보낼 수 있죠. 금덩이를 옮겨야 할 때는 가장 빠른 화물기에 실어 보내도 몇 시간이 걸리지만, 비트코인을 보내는 데는 길어야 몇 분이 걸릴 뿐입니다.

그런데 지폐나 동전, 아니면 어딘가 더 공식적인 문서처럼 보이는 수표도 결국엔 은행이나 국가처럼 신뢰할 수 있는 제삼자가 중앙에서 관리하는 권한에 기댄 제도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신뢰의 기반이란 국가가 세운 법이고, 좀 더 옛날식으로 말하면 왕의 칙령이었죠.

반대로 비트코인을 주고받는 과정은 완전히 다릅니다. 수학적으로는 대단히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만, 핵심만 추리자면 결국 누구한테 (어느 주소로) 얼마를 보내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비트코인 거래를 차단하는 건 결국 그 말을 못하게 막는다는 것인데, 그런다고 비트코인을 주고받는 데 쓰이는 기술은 멈출 수 없습니다. 코디 윌슨과 디펜스 디스트리뷰티드(Defense Distributed)의 사례에서 정확히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글로 쓴 것은 표현에 해당하고, 이는 곧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다른 무엇보다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비트코인의 거래를 관장하는 코드도 표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제 전반을, 아니면 적어도 일부분이라도 중앙의 권력이 장악하지 않는 경제 체제로 새로 꾸리려 할 때,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코드를 보호한다는 의미에서는 일종의 검열도 필요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어떤 식으로든 미국이나 주권국가의 법체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코드가 곧 법이다." 같은 문구가 희망 사항일 뿐 실제로 효력을 갖는 말이 아닌 이유도 마찬가지죠.

비트코인은 그 자체로 기존 법에 구속받지 않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비트코인의 특성을 살린 결제 방식에서는 이른바 입금 취소(charge-backs)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트코인 네트워크에서 검증된 거래는 되돌릴 수 없으므로 한쪽이 이를 파기할 수 없고, 여기서 분란이 발생했을 때 이를 중재하기 위해 법이 개입할 여지도 없습니다. 비트코인이 발전하면 이 속성이 변해 비트코인 거래를 관장하는 원칙과 법이 생길 수도 있는데, 지금 단계에서는 누가 이 제도를 어떻게 구축해나가게 될지, 어떤 법이 적용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혁신적인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기득권 세력은 이 기술을 달가워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했을 때 성경을 해석하던 독점적 권위를 잃게 된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기술을 눈엣가시로 여겼죠. 무기, 불, 인쇄기, 전화기, 복사기, 컴퓨터, 녹음기 등 이런 사례는 역사에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이 싫어한다고 해서 개발할 권리를 인정받은 사람만 개발에 참여하거나 규제를 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새로운 기술이 보통 최선의 상황에 적용돼 곧바로 진보를 이끄는 경우는 사실 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영역에서 먼저 쓰이기도 하고, 악당들이 발 빠르게 기술을 채택하기도 하죠. 물론 누가 누구를 악당으로 규정하는 문제가 있겠지만요. 미국에는 소련이 악당이고, 반대로 소련에는 미국이 악당이었으니까. 아일랜드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서는 피임법을 공유하고 알리는 것조차 금지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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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 가운데, 원래 가치와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는 사례로 꼽아주실 만한 게 있을까요? 먼저 비트코인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래 의도한 바를 이루는 데 잘 쓰이고 있는 건가요?

앞서 말했듯이 비트코인은 기본적으로는 원래 비전대로 운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화폐를 주고받을 수 있고,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쓸 수도 있으며, (자산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투기 목적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트코인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많은 암호화폐, 각종 블록체인에는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누구나 쉽게 떠올리거나 이해할 만한 이용 사례조차 없으니까요.

실로 쓰임새가 다양한 토큰이 선보이고 있죠.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지급되는 평판 토큰(reputation token), 관심을 받는 정도에 따라 지급되는 관심 토큰(attention token), 자선 목적의 기부에 특화된 토큰(charitable giving token)까지. 전부 다 취지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알맹이 없이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며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라고요.

특히 이 토큰들이 주목받은 계기도 비트코인이 부상한 과정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이더리움도 아직 재미있는 이용 사례를 못 봤어요. 적어도 저는 못 봤다는 뜻입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레딧이나 트위터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그러고 싶지도 않기도 하고요.

이제 알아서 개발과 진화에 속도가 붙고 있는 블록체인이라는 산업은 여러 갈래로 분화하고 있습니다. 프라이빗 블록체인, 은행이 관장하는 블록체인, 퍼블릭 블록체인, 아니면 심지어 비트코인 블록체인을 활용한 프로젝트도 상당히 많죠. 쓸모 있는 이용 사례가 나올 수도 있고, 순전히 투기용 아니면 진지한 고민 없이 찔러보는 데 그치고 마는 것들도 적잖을 거예요. 솔직히 청혼하는 이벤트를 왜 굳이 블록체인에다 기록한답니까? 그런 건 기술 혁신에는 아무런 기여도 못 하겠죠.

어쨌든 블록체인 세상에서는 이제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스타트업 개수는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모여 만든 컨소시엄, 대체 암호화폐, ICO, 콘퍼런스, 엑스포, 하드포크, 새로운 프로토콜까지 이 바닥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는데, 그런데도 새로운 콘퍼런스가 거의 매주 열리고 있어요.

사람들은 도쿄, 키예프, 칸쿤을 돌며 행사에 참석하느라 바쁩니다. 작은 콘퍼런스에도 몇백 명 정도는 쉽게 모이고, 규모가 큰 콘퍼런스는 8천 명, 1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이 모이죠. 새로운 신용카드를 출시할 때 이만한 관심이 쏠릴까요? 세상 사람 대부분이 모르는 사이 태어난 비트코인은요?

사람들은 그 많은 행사에 직접 참석하고 관련 소식은 훑더라도 사실 프로젝트의 바탕을 설명한 기술에 관한 세부사항은 읽고 이해할 여력이 없어요. 그러다 보면 새로운 것이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이 바닥에서 지치거나 토론이 공허하게 느껴지겠죠. 아직 명확히 손에 쥘 것은 없는데 이를 얻기 위해 들여야 할 품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제 주변에 암호화폐로 큰돈을 벌었거나 규모가 꽤 되는 자산을 운용하게 됐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비트코인이나 비트코인캐시에 투자한 사람들입니다. 라이트닝(Lightning)이니 아발란체(Avalanche)니, 30위권 혹은 100위권에 드는 알트코인에 손을 댄 사람 중에는 그만큼 잘 됐다는 사람 못 봤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암호화폐를 가치를 이전하는 거래에 쓰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시는 건가요?

글쎄요, 이 모든 암호화폐를 둘러싼 관심과 열풍이 기껏 모든 걸 문서로 만들고 기록해 국가(중앙 권력)가 전에 없는 감시의 날을 세우는 사회로 이어진다면 엄청난 재앙이 되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지야 않겠지만, 우리 모두 잊지 않고 늘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른바 고객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으면 현금 거래는 물론 송금이나 수표도 보낼 수 없는 현재 상황과 암호화폐 기반 거래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암호화폐 거래에까지 지금의 금융 거래 관련 규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다 보면 암호화폐의 장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한 괴물 같은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말 겁니다. 그런 시스템은 없느니만 못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려는 나라들이 이미 여럿 눈에 띕니다.

쉽게 말해 인터넷 신분증을 만들겠다는 시도에 우리는 모두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긴 하지만, 반대로 오늘날 인터넷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인터넷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본뜬 것은 또 아니지 않나요? 그러면서도 인터넷이 문제가 많다지만 분명히 인류의 진보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주의를 시키는 겁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듯이 돈과 가치를 이전하는 거래를 제한하려 한다면 그거야말로 끔찍한 일이라는 거죠. 걱정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분이 계실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고객파악제도는 결국 "지금 네가 사준 김밥값 다음 주에 알바 월급 받으면 갚을게"라는 말을 금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요.

이는 곧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과 마찬가지죠. 헌법에서 보장한 권리를요. 고객파악제도를 책과 언론에 적용하면 '독자가 누군지 신원을 확인해서 (권력이 정한 기준에) 문제없는 사람만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어요. 자유를 보장하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중앙에서 관리하며 일일이 승인을 받아야 실행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느냐의 갈림길이요. 그런데 사실 이 논쟁은 무려 25년 전에도 무척 활발했어요. 당시 정부와 경찰을 비롯한 중앙 권력도 이를 잘 알고 있었죠.

그때부터 이어진 논쟁과 힘겨루기의 결과가 지금 우리의 일상생활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죠. 중앙 권력은 요소마다 촘촘히 감시 카메라, 스캐너를 설치해두었고, 암호화와 프라이버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개발되자 그에 대응해 강제로 암호를 풀어내는 권한, 백도어, 에스크로 같은 개념이 등장했죠.

지금은 스마트폰, PC에 몇 기가바이트는 족히 되는 사진, 편지, 사업 관련 업무 정보를 들고 다니는 시대에요. 권리장전이 쓰인 시대에는 아마 자료를 일일이 인쇄해 집안을 가득 채워도 스마트폰 속 자료에 못 미쳤을 겁니다. 그러니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중앙의 권력이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도 문제지만, 미국보다 훨씬 더 문제가 심각한 곳도 많아요. 데이터를 제대로 지켜낼 방법도 얼른 고안해내야 하고, 무엇보다 법을 만들고 정책을 세우는 정치인들이 사안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기업들은 이른바 기업형 블록체인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데, 대형 컨소시엄도 생겨났고, 규제에 부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카르텔이 형성된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데이터 침해나 범죄를 법으로 막거나 정부가 감독하면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을 비롯해 정부가 어쨌든 제대로 굴러가는 나라들에서는 더욱 그런 여론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럴수록 우리는 미국 정부가 가혹한 행위를 묵인하거나 방조해온 역사를 떠올려야 합니다. 모르몬 교도들을 박해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살했으며, 온갖 폭력을 방조하고 일본인의 후손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무작정 감옥에 집어넣은 적도 있어요.

정부 권력이 감시 사회의 선봉에 서 있는 중국이나 이란 같은 나라에서는 고객파악제도가 필연적으로 인터넷 검열(know your writers)로 이어질 겁니다. 그 결과는 대단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모든 문제가 결국 권력과 권력 균형으로 귀결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 먼저 중앙화된 인터넷이 탄생시킨 것 가운데 정말 좋은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 하나도 없는 겁니까?

왜 없겠어요, 당연히 있죠. 제가 지금 인터넷 덕분에 세상이 좋아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가 지적하려는 부분은 여기서 파생된 문제를 절대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는 점이에요. 중국 정부는 사이버 보안을 구실 삼아 자국민의 인터넷 활동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었어요. IT 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협조를 얻어냈기에 가능한 일이죠. 중국 정부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시민 신뢰 지수"라는 지표를 만들어 운영하는데, 정부가 나서서 보안을 책임지는 것이 취지는 좋지만, 이 지표가 나쁘면 은행 계좌를 만들 수도, 호텔을 예약할 수도, 중국 안에서 다른 도시를 여행할 수도 없어요.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거대한 감시 사회, 정부가 모든 것을 기록하고 통제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앞장서서 부역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겉으로야 다른 그럴듯한 이유를 대겠지만요.

빅브라더를 우려하는 좌파 진영에서나 할 법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적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나 자유지상주의자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실제로 수십 년 전부터 이런 감시 사회의 위험을 지적하는 글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그때보다 지금이 감시 사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열역학이나 기계 법칙, 운동 법칙에는 소위 '자유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피스톤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회전 날개는 알아서 돌아가고 하는 식으로요. 저는 어떤 면에서는 사회나 경제가 굴러가는 데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도를 높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치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 폭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암호화폐 시대에 어울릴 만한 선언문 같은 것을 써보실 생각은 혹시 없으신지요? 예전에 암호화 무정부주의자 선언을 바뀐 시대에 맞춰 업데이트하는 거죠.

아뇨,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그때는 정말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또 썼는데요, 지금은 그때 저를 끓어오르게 하던 제 안의 무언가가 없어요. 그때 그 사고와 열정을 묶어서 제대로 된 책을 하나 쓰지 못한 건 한편으로 아쉽기는 한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언가를 편찬할 생각도 없어요. 아무래도 여러모로 무리라고 생각해요.

 

이 지점에서 당신이 걸어온 길을 한 번 같이 되짚어 봅시다. 사이퍼 펑크가 꽃을 피운 초창기의 시선으로 지금 암호화폐 현상을 바라본다면 어울릴 만한 비유가 있을까요?

벌써 30년 전의 일이네요. 저는 강력한 암호가 가져올 수 있는 효용과 그 의미에 그야말로 푹 빠졌습니다. 반면 사이퍼 펑크를 정의하는 부분, 그러니까 "비밀스러운 문자를 주고받는" 데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보다 정부의 규제와 감시에서 벗어나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돈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할 준비가 된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 당시 제게는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죠.

저는 이를 가리켜 "암호화 무정부 상태"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1988년에 "암호화 무정부주의자 선언"의 초안을 쓰기 시작했어요. 다른 유명한 선언문과 소위 아나코 자본주의(anarcho-capitalism)로 불리는 무정부주의 사상을 참고했어요. 다만 러시아에서 나타났던 무정부주의나 노동조합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고요, 단지 자유 무역과 자발적인 거래에 초점을 더 맞췄다고 할 수 있죠.

그때 암호화 세계에는 유명한 콘퍼런스라 불릴 만한 것이 크립토(Crypto) 하나였고, 유로크립트(EuroCrypt)나 아시아크립트(AsiaCrypt)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모임이었어요. 암호학을 경제학이나 기관 혹은 정치학에 접목한 논문은 사실상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암호학회라 부를 만한 것은 아예 없었죠. 미칼리와 골드바서, 래코프가 쓴 '영지식 상호증명 체계(Zero Knowledge Interactive Proof Systems)' 같은 게임이론 분야의 논문 가운데 정말 중요한 논문들이 더러 있었고요.

암호학과 암호화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몇 년을 공부하고 고민했습니다. 1986년 인텔에서 퇴사한 뒤 하루에 몇 시간씩 꼬박꼬박 암호학 관련 논문을 읽으며 이제 조금씩 불가능에서 가능의 영역으로 넘어오던 이 현상을 이해하고 제 머릿속의 생각을 다듬었습니다. 그때 관찰, 논의되던 현상이 무엇이었냐면 사이버 공간의 데이터 보금자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금융기관, 점진적인 암호화(timed-release crypto), 디지털상의 비밀 메시지 전달 방식(steganography), 그리고 디지털 화폐 같은 것들이었죠. 여담이지만 당시 인텔 퇴사하며 받은 주식이 지금 100배 가까이 오른 건 경사라면 경사였고요.

당시 저는 에릭 휴즈(Eric Hughes)를 알게 됐는데, 에릭이 먼저 제가 머물던 산타크루즈 근처로 와서 만났어요. 우리는 암호화에 관해 의견을 묻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이 분야의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서로 추천해 조금씩 모임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모임 장소는 그가 1992년 늦여름 오클랜드힐즈에 세 들어 살기 시작한 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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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화폐에 관한 논의도 있었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그때 비트코인이나 암호화폐의 등장을 예견한 논문이나 학자, 전문가가 있었나요?

논문이나 학술적인 건 잘 모르겠고, 한 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하자면, 제가 우리 첫 번째 모임에서 보드게임 모나폴리(Monopoly)에서 쓰는 게임용 지폐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었어요. 재미있는 사례라고 표현한 것이 훗날 비트코인이 처음 등장해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고 거래됐을 때 많은 사람이 새로운 형태의 화폐로 게임을 하는 것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사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비트코인 피자 두 판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그렇지 않나요?

어쨌든 우리는 제가 나눠준 모나폴리용 게임머니를 가지고 강력한 암호로 보호되는 세상이 어떤 식으로 굴러갈지를 최대한 시뮬레이션해보려 했습니다. 데이터가 안전하게 보관되는 데이터 보금자리나 암시장, 안전한 메시지(remailer, 차움의 표현을 빌리면 혼합 메일, mixes)를 주고받는 세상을 상상력을 동원해 구현해보려 한 거죠.

그중에는 나중에 실크로드로 발전한 것의 모태라 부를 만한 아이디어도 있었어요. 기자들이 저더러 왜 그때 암시장을 설명한 블랙넷(BlackNet)의 개념을 조금 더 구체화해 널리 알리지 않았냐고 물어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제 대답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 당시에 그런 글을 회람했다가는 십중팔구 체포돼 감옥에 갔을 거라고요.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글로 써 회람하는 것은 지금 미국에서는 표현의 자유로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죠.

어쨌든 우리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기 시작했고, 이내 모임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이들이 추려졌어요. 존 길모어와 휴즈 다니엘이 아예 메일링 리스트를 만들어 소식을 전했죠. 모이면 누가 중개하거나 진행하거나 내용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토론을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이어갔습니다. 정부가 하는 검열과 혼동될까봐 함부로 쓰기 조심스러운 단어이긴 하지만, 당연히 검열 같은 건 없었습니다. 자연히 모임을 이끄는 누군가도 없었어요. 리더십이라는 것이 딱히 필요한 조직이 아니기도 했고요.

우리 가운데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오간 메시지와 소고의 80% 정도를 썼는데, 물론 여기도 딱히 어떤 원칙과 절차가 있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야 만에 하나 정부가 우리를 '단속'하려 들 때 이 모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죠.

자연히 한 곳에 권한이 집중되지 않은, 분산된, 누구나 별도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참여할 수 있는, 중개인 없는 개인과 개인의 소통, 토론 구조라는 특징이 자연스럽게 정착됐어요. 무정부 상태를 뜻하는 'anarchy'란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arch, 즉 지붕 또는 위에 군림하는 누군가가 an,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 당시 우리 모임의 구조가 정확히 그랬죠. 1970년대 중반 데이비드 프리드먼이 저서 <The Machinery of Freedom)>에서 고찰했던 구조이기도 하고, 뒤에 브루스 벤슨도 <The Enterprise of Law>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죠.

벤슨은 상부 권한이 따로 없는 법체계의 효과를 연구했어요.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고 싶어 하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뭘 먹을지, 누구랑 어울릴지, 무얼 읽고 무얼 볼지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갑자기 정부나 독재자, 폭군이 그 선택에 간섭하고 선택지를 제약하려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은 여기에 저항하거나 간섭을 무력화할 방법을 찾게 되죠. 피임, (불온서적으로 지적된) 수많은 글과 작품들, 몰래 주파수를 맞춰 듣는 자유로운 세상의 소식, 복사한 카세트테이프, USB 등 방법은 끝도 없고요.

훗날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을 만든 데는 이런 여러 가지 정황과 반작용이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사토시의 백서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부분이나 아이디어가 있나요?

사실 그 당시 저는 한창 다른 프로젝트를 하느라 비트코인에 관련된 논의를 처음부터 제대로 들여다보지는 못했어요. 친구인 닉 자보가 2006~2008년에 암호화폐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긴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비트코인 백서를 처음 읽고 곧바로 느낌이 오진 않았어요. 모나폴리용 지폐를 가지고 거래하는 것 같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을 뿐 별 관심이 가지 않았죠. 현실에서 일어난 것처럼 비트코인이 이렇게 엄청나고 대단한 현상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디지털 화폐가 어떻게 작동하고, 이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여러 측면에 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고민을 백서에 녹였습니다. 백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회의론도 거세게 일었죠.

2009년 초, 베타 버전보다도 전인 알파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비트코인의 프로토타입이 등장합니다. 할 핀니(Hal Finney)가 사토시와 처음으로 비트코인을 거래했죠. 몇 차례 비슷한 실험이 이어졌고, 사토시는 직접 비트코인이 아무도 쓰지 않아 가치가 0이 되든지, 엄청난 가치를 지닌 현상이 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는 말까지 합니다. 많은 사람이 비트코인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였거나 사토시의 말대로 가치가 0이 되고 말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보를 빠르게 주고받는 또 하나의 사고 실험 정도에 그치고 말 거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비트코인의 첫 거래로 대중에 잘 알려진 피자 두 판 거래만 보더라도 여전히 비트코인은 확실히 장난감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전히 모나폴리용 지폐처럼 쓰임새가 제한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이제는 가치가 늘어난 만큼 적어도 장난감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당연히 장난감이라고 불러선 안 되죠. 제 생각이 틀렸던 겁니다. 이미 그렇게 된 지 몇 년도 더 됐어요. 그렇다고 당장 기존 화폐를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왈라 은행처럼 기록과 신뢰만으로 돈이 오간다면 거기에는 쓰일 수 있겠죠. 아니면 송금에, 암시장이나 그와 비슷한 닫힌 체계에서 쓰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어쨌든 저는 평생, 이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엄청난 마니아층이 순식간에 생겨난 현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닷컴버블 때도 이렇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때도 그야말로 광기 어린 시기이긴 했죠. 말도 안 되는 과장 보도가 난무하는데도 조명만 받으면 실체도 없는 회사의 주식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니까요. 거품이 꺼지고 나서 실리콘밸리에는 "요즘엔 누가 우주에 가자고 떠벌리고 다닌대?" 같은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그런 농담을 들어줄 사람도 잘 없을 정도로 실리콘밸리 사무실들은 텅 비어있었죠.

저는 여전히 암호화폐가 너무 복잡한 개념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코인에 포크에 샤딩에, 오프체인에서 거래를 처리하면 어쩌고, DAG는 또 뭐고, 작업증명이냐 지분증명이냐 논란까지 보통 사람이 이걸 무슨 수로 다 이해하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 거 말고 '봐라, 암호화폐를 활용해 어떤 문제를 이렇게 말끔하게 해결했다!' 혹은 이런 데 쓰이면 된다는 내세울 만한 사례가 있나요? 없죠, 아직은 없어요. 언젠가 금융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신용카드나 페이팔 등 결제 과정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논의는 정말 많은데, 미래의 가능성 말고 지금 뭘 이뤘냐를 보면 내세울 만한 게 과연 있느냐는 거죠.

개인적으로 지금껏 나온 암호화폐의 쓰임새 가운데 그나마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 페이팔이나 비자 등 기존 결제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하는 곳으로 암호화폐를 이용해 송금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글쎄요, 나머지는 전부 다 알맹이 없는 과대광고에 허풍에 언젠가 열 배, 백 배 오를 테니 그냥 들고 있으라는 식의 배금주의의 일그러진 단면에 불과한 것 같아요. 쓰레기죠.

 

그렇게 비판적으로 보시는 거군요. 그렇다면 (닷컴 버블이 그러했듯) 원래 인프라가 구축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처음에 다소 과장된 열기에 힘입어 한바탕 소동을 겪기 마련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으시나요?

좀 어수선한 과정을 거쳐 발전할 때도 물론 있죠. 비행기가 사고로 추락할 수도 있고, 댐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이를 토대로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면 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암호화폐 생태계에는 반면교사로 삼아 발전할 수 있는 수준의 결함이라기에는 너무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프로그래밍 오류에 기본적인 개념부터 오류투성이, 보안도 시스템을 지탱하기에는 형편없는 수준이에요. 이미 수백만 달러가 분실, 도난당했는데 이를 복구할 방법도 없잖아요.

예를 들어 은행이 지금 암호화폐처럼 허점투성인 보안 환경 탓에 고객의 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온갖 비난의 십자포화를 맞겠죠. 그렇지만 어쨌든 안전장치가 풀리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안전장치를 만든 제조사는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 찾아낸 뒤 이를 고칠 겁니다. 문제를 개선해 보안을 성공적으로 강화하면 안전장치를 쓰는 은행으로서는 보험료를 덜 내는 셈이 되는 거죠. 정확히 이런 과정이 암호화폐 세계와 암호화폐 거래소에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암호화폐 기술자를 대학이 나서서 교육한다고 뚝딱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호화폐 전문가나 연구 인력은 더욱더 그렇죠. 암호화폐를 제대로 공부하고 익히려면 게임이론, 확률 이론, 금융, 프로그래밍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동전이나 지폐를 어떻게 쓰는지 책을 통해 배우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어른들이 돈을 쓰는 걸 보고 직관적으로 이를 익히죠. 신용카드를 처음 발급받고 쓰기 전에 매뉴얼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도 그랬고요. 그냥 써보고 결제가 처리되면 편리해서 좋은 겁니다. 암호화폐 지갑, 콜드 스토리지나 암호화폐 관련 프로토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자들은 복잡한 배경지식이나 시시콜콜한 스펙을 다 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고객들도 얼마든지 편리하게 쓸 수 있어야만 암호화폐가 제대로 보급될 겁니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훨씬 보안이 강화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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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투기, 거품과 기술 혁신이라는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한데 얽혀 있다는 주장을 싫어하시는 것 같네요.

혁신은 좋죠. 언제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입니다. 칩(chip) 업계를 예로 들어볼까요? 더 좋은 칩을 만드는 경쟁은 지금도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 업계 전체가 혁신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칩 업계가 어디 매주 전 세계를 돌며 휘황찬란한 콘퍼런스를 열던가요? 기존 제품보다 무엇이 어떻게 좋아졌는지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는 아이디어 단계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제품을 발표하던가요?

주장하는 바를 증명하지 못한 아이디어는 폐기해야 하는 거지 그걸 어떻게든 살려서 심지어 회사를 만들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요? 물론 이유는 있습니다. 돈이 되니까 그러는 거겠죠. 특히 지금 암호화폐 판에는 뭐든 발표만 하면 몇백억 원, 몇천억 원 모으는 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니까요. 자세히 뜯어보면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대박이 터지기를 기도하는 심정의 투기꾼들이 너무 많아요. 다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런 자본이 암호화폐 시장을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친구 중에도 암호화폐 기업이나 거래소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있고, 주로 암호화폐로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궁리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러니 암호화폐를 거래소에 상장하는 데 목숨을 걸게 되죠. 거래소에서 취급해야만 고속 거래, 공매도, 공매수, 헷징 등 여러 메커니즘을 활용해 가격을 부풀릴 수 있으니까요. 기존의 결제 채널, 금융 시스템에서 소외받은 곳에 결제나 자산 보유 등 화폐의 기능을 가져다줄 가능성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날카로운 비판을 하신다는 건 그만큼 이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맥락을 짚고 있다는 뜻일 텐데요, 반대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어디를 고쳐야 암호화폐 분야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비판할 거리가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제가 레딧이나 트위터에 올라오는 관련 글과 댓글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사실 전 트위터 계정도 없긴 합니다.

글쎄요, 어떻게 해야, 어디를 고쳐야 할까요? 새로운 기술이 쓰이기 적합한 분야가 있으면 자연히 기술이 쓰이면서 길이 날 겁니다. 한동안 실크로드를 비롯한 암시장이 비트코인의 대표적인 쓰임새였던 것처럼 말이죠. 요즘에는 호들링, 다시 말해 투자해놓고 무조건 팔지 않고 버티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 같고, 이더리움은 온라인 도박에 많이 쓰인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어느 쪽이든 돈을 잃기 딱 좋은 분야죠. 그런 건 가만 내버려 둬도 알아서 망할 겁니다.

암호화폐를 둘러싼 거품이나 과장도 제 나름대로 기여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암호화폐는 세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될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적어도 미래는 결국 온라인, 디지털에 달렸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다시 한번 지적하고 싶은 건 거품이 껴도 너무 꼈고, 기본적인 뼈대 없이 무조건 부풀리기만 한 탓에 사람들이 뭔지도 모르고 너무 몰려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상황은 마치 갑자기 사람들이 우리가 몰랐던 다른 세상이 이쪽 세상 건너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앞다투어 집 뒷마당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갈 때 타고 갈 배를 만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배를 타고 파도를 헤치고 새로운 세상에 닿는 사람도 없진 않겠지만, 배를 만들다 말 사람들, 어설프게 만든 배를 타고 섣불리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한때 마니페스토, 즉 다양한 선언이 여기저기서 나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선언이란 모두가 따라야 하는 지침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아갈 방향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양이와 소통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고양이에게는 명령이란 걸 해봤자 절대 듣질 않잖아요. 대신 고양이에게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제안을 하면 고양이가 기분에 따라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대로 따르고, 아니면 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리: 긴 인터뷰였던 만큼 몇 가지 핵심과 함께 좀 더 생각해볼 점을 추렸다.

 

 


  • 뭔가 있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그 제품이나 서비스를 써서는 안 된다.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만 엄선해 써야 한다. 지금까지 암호화폐가 진정 해결한 문제가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대부분은 암호화폐나 암호화폐류의 기술로 풀어낼 수 없다. "좀 더 나은 기부 메커니즘" 같은, 사실상 쓸데없는 데 힘을 써봤자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 수학은 법이 아니다.

  • 암호화폐를 보통 사람이 간편하게 사용하려면 아직 멀었다. 기술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사람도 여전히 쓰기 어렵다.

  • 자유로운 거래와 표현의 자유 문제를 늘 고민해야 한다. 비트코인 백서와 암호화폐를 낳은 근본적인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부의 규제 정책에 부합하는 암호화폐는 결국, 기존 금융 시스템의 문제를 전혀 고치지 못할 것이다.

  • 이 세상에 시민을 억압하는 정부, 폭군(tyrants)이 아직 널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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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뉴스페퍼민트

#1_김진화 코빗 공동창업자: 사토시 페이퍼 10년, 그리고 ‘래디컬 마켓’

#2_김재윤 디사이퍼 회장: 당신의 블록체인은 ‘진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가

#3_정우현 아톰릭스컨설팅 대표: 이처럼 이과적 소양과 문과적 감성 모두 요구하는 게 또 있을까

#4_문영훈 논스 대표: 미래의 혁명가들이여, 논스로 오라!

#5_김종승 SKT 블록체인사업개발Unit Token X Hub TF장: 화폐 르네상스,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6_이송이 37coins 창업자: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세계평화’의 꿈은 현재진행형

#7_어준선 코인플러그 대표: 사토시, 비탈릭, 그리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자세

#8_이준행 고팍스 대표: 기회는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투명한 자본조달 구조 바꿔보자

#9_김휘상 해시드 CIO: 블록체인이 우리의 노동과 데이터 주권을 뒤바꿀 것이다

#10_찰리 슈렘 비트인스턴트 창업자: 베네수엘라, 터키 경제위기를 ‘남의 일’로 여기는 당신께

#11_아담 크렐렌스타인 심비온트 공동창업자: 사토시의 비전은 암호화폐보다 분산원장 기술에 녹아있다

#12_브루스 펜턴 애틀란틱 파이낸셜 CEO: 비트코인 백서는 헌법이다

#13_데이비드 슈와르츠 리플 CTO: 포드자동차 모델T 110주년, 비트코인 백서 10주년

#14_샘슨 모우 블록스트림 CSO: 비트코인 백서는 ‘성경’이 아니다

#15_리처드 젠달 브라운 R3 CTO: ‘비트코인 미신’ 벗어나려면 백서 속 이 문장을 보라

#16_마이크 벨시 비트고 공동창립자: 우리는 더 나은 형태의 돈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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