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시리아민주연방(Democratic Federation of Northern Syria).

쿠르드어로 서쪽을 뜻하는 로자바(Rojava)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지난 2012년 시리아에서 독립을 선언한 사실상의 준자치 구역이다. 쿠르드인이 대부분인 로자바 사람들은 공동체 차원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과감하게 벌여나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치 체제로서 민주 연합주의(democratic confederation) 실험이고, 국가가 없는 권력의 진공 상태가 빚어준 탈중앙화 환경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다양한 분야에 접목해 시너지 효과를 살펴보는 실험들도 주목받고 있다.

지역의 기술자, 개발자들이 블록체인 실험을 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필자도 지금 여기에 블록체인 실험을 취재하고 직접 돕고자 와 있다. 블록체인 실험이 아니라도 로자바는 지난해 말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을 시리아에서 철군하겠다고 급작스럽게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황량한 모래사막과 죽음뿐"인 시리아에서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지만, ISIS는 사실상 궤멸 상태라며 철군을 명령했다.

불과 몇 달 만에 철군은 사실상 없던 일이 되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철군을 발표하자 시리아 북부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터키가 로자바를 공격해올 거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터키는 2016년부터 로자바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터키가 로자바를 점령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겠지만, 당장 민주 연합주의 실험이 좌초하는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권력을 분산해 운영하는 민주 연합주의는 강력한 국민국가의 중앙 정부 권력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앙 권력에 맞서 추진해 온 많은 실험과 기술을 활용한 각종 저항 운동도 그대로 끝나버릴 것이다.

나는 앞서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가 로자바에 가져다줄 수 있는 혜택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비록 서구의 지원이 사실상 전무한 로자바에는 기본적인 안보를 비롯해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그 때문에 로자바에는 서구 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환경이 조성됐다. 새로운 사회적 지배구조(governance)를 실험하고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나는 로자바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세우고 새로운 실험에 활력을 불어넣는 프로젝트를 직접 도우며 두 눈으로 지켜보고자 지난 몇 달간 로자바에 오려고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은 암호화폐에 대한 지식과 언론을 통해 로자바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리는 일이었다. 마침내 오랜 바람을 이룰 수 있었다. 약 한 달 전인 2월 25일, 나는 로자바에 도착했다.

민주 연합주의를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시민운동가들은 로자바에도 기존 자본주의 체제와 위계질서에 의존한 지역 경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며 경계했다. 로자바 기술 개발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에르셀란 세르뎀은 친숙한 자본주의 질서에 맞서 생태와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 체제를 전파하고자 힘을 쏟고 있다. (시민운동가들은 이 새로운 경제 질서를 가리켜 "민주적 현대화(democratic modernity)"라고 부른다)

세르뎀은 명확한 철학과 기술을 접목하면 민주적 현대화 경제를 뿌리내리는 것이 결코 헛된 희망이 아니라고 말한다.

"고도의 기술을 토대로 한 제도, 사회 전체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내고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며 경제를 가꿔가는 것이 우리의 종합적인 목표다. 탈중앙화된 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탈중앙화된 기술이어야 한다."

시리아 북부 카미실리(Qamishli) 거리의 하늘을 복잡하게 얽힌 전선이 뒤덮고 있다.

 

참전 군인과 사회적 공학자가 손을 잡다


세르뎀이 만들고 있는 교육 기관의 목적은 다양한 탈중앙화 기술을 장착한 기술자(해커)를 양성하는 것이다. 교육받은 해커들은 디지털 거버넌스 관련 연구를 하거나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솔루션을 천연자원을 공평하게 나누어 쓰는 데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 일을 하게 된다. 세르뎀은 계속해서 로자바 전역에서 관련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강사를 찾고 있으며,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군인들에게 프로그래밍의 기초부터 가르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현재 참전군인 서른 명 가량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기술을 배우고 있다.

세르뎀은 시리아 북부 지역의 기술 인재를 모으는 것뿐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일하는 해커와 철학자를 지칭하는 사회적 공학자(social engineers)들에게 민주 연합주의 등 중요한 개념들을 계속 다듬고 정립하는 작업에 힘을 모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철학적 기초를 다지지 않고 기술에만 매달린다면 지금 우리가 구축하고자 하는 시스템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세르뎀의 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세르뎀이 세운 교육 기관의 회원이기도 한 호잔 마모도 세르뎀과 생각이 같다.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해커들이 시민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분산화된 거버넌스 방식을 통해 의사결정 과정을 공식화할 수 있고, 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모는 이어 로자바에서는 전자 결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암호화폐가 그 자체로도 쓸모있을 거라고 말했다. 현재 로자바 주민들은 시리아 정부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준자치 구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시리아 정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모는 궁극적으로 암호화폐 기반 경제로 바꾸기 위해 우선 지역 상점과 상인들이 암호화폐로 결제를 받을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있다.

카미실리 인터넷 가게 앞에 모여있는 젊은이들

 

암호화폐의 정신


하지만 탈중앙화 프로젝트 전반을 향한 싸늘한 시선도 적지 않다.

갑자기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로자바 사람들은 페이스북, 유튜브, 왓츠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로자바에서 기술이란 곧 소셜미디어를 의미하며, 많은 것이 공유되고 전달되는 소셜미디어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도 비약적으로 커졌다.

스마트폰 사용이 갑자기 늘어나다 보니 자연히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이 사회의 많은 양상을 순식간에 바꿔놓는 데 대한 일종의 거부감도 생겼다. 이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기술이 자리 잡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세르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 교육 기관에서 먼저 기술이 무엇인지를 다시 정의하기 위해 치열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즉, 대기업이 소셜미디어를 사실상 독점하고 기업의 이윤과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시킨 기술의 면모 대신 로자바의 인프라 네트워크와 하드웨어를 구축해 공동체를 뒷받침하는 데 쓰이는 기술의 특징에 주목하도록 기술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기로 한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기술이 존재할 수 있다. 국민국가가 지원하고 가져다 쓰는 기술이 있고, 회사가 쓰는 기술이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저항 운동이 채용하는 기술이 있을 수 있다. 저항 운동 진영의 기술이란 현상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도구로 쓰인다."

비트코인과 다른 탈중앙화 기술은 이러한 저항 정신, 레지스탕스 기술에 꼭 들어맞는다. 역사적으로 억압받던 세력이 권리를 되찾고자 힘을 기르는 데 쓰인 도구와 닮은 부분이 많다. 세르뎀은 자체 교육 기관에서 이러한 저항 정신을 담은 대안 기술을 개발해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저항 운동을 통해 탄생한 저항의 기술을 모두가 활용할 수 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딘 단계지만, 민주적 현대화를 위해 필요한 기술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곧 구체화될 것이고, 그러고 나면 기술 개발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마모는 이용하기 쉽고 보안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만 하면 기술은 대단히 빠르게 퍼질 거로 내다봤다. 특히 젊은 세대가 기술을 빨리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로자바의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이해도도 높다고 마모는 말했다.

로자바가 독립하기 전에 시리아 정부는 일부러 이 지역에서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고 방해했다. 아예 대학 교육 자체를 금지하고, 스스로 기술을 배워 나누려고 한 사람을 체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모는 필히 올 수밖에 없던 혁명이 마침내 당도해 모두가 기술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무척 빠르게 발전하는 상황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 모인 카시밀리 시민들. 가운데 압둘라 외잘란의 포스터가 보인다.

 

세르뎀과 시민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것은 기술을 향한 열린 태도만이 아니다. 로자바의 기술 교육 기관은 철학적인 사유와 토론에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로자바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 사상가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의 사상은 일종의 교과서와도 같다.

외잘란은 권위주의 위계질서와 이를 지탱하는 기존의 제도를 타파하고 사회 구조 전반을 근본적으로 다시 세우고자 했다. 이는 많은 암호화폐 지지자가 생각하는 이상향이나 오픈소스 운동을 지탱하는 가치관과도 맞닿아있다. 세르뎀은 결국 로자바의 교육 기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는 탈중앙화 기술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새로운 공동체는 기술적 문제를 풀어내고 사회적 공학자를 길러내며 윤리적인 사회에서 의사소통의 창구가 되고 공동체를 꾸려갈 정치인을 양성할 것이다. 로자바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오픈소스 정신과 철학이며, 오픈소스를 바탕으로 정보를 얻고 공유하고 소비하는 사회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 취재원의 안전을 위해 본문에 등장한 에르셀란 세르뎀과 호잔 마모라는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다.

* 기사에 등장한 모든 사진은 코인데스크의 레이첼로즈 오리어리 기자가 직접 찍은 것이다.

번역: 뉴스페퍼민트

제보, 보도자료는 contact@coindeskkorea.com
저작권자 © 코인데스크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