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암호화폐 공시 플랫폼 쟁글(Xangle) 베타 버전이 세상에 나왔다. 불과 넉달 전 설립된 블록체인 스타트업 크로스앵글이 '암호화폐 공시'라는 미증유의 시장을 만들어 내겠다던 야심찬 포부가 형상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반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9년 7월 현재 크로스앵글은 코빗, 씨피닥스(CPDAX), 고팍스, 빗썸, 한빗코, 코인원, 비트소닉, 지닥 등 국내 거래소 8곳과 업무 협약을 맺었다. 쟁글이 만든 암호화폐 상장 적격성 평가 보고서가 향후 이들 거래소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제공된다. 크로스앵글은 현재 일본과 유럽 등에 기반을 둔 글로벌 거래소들과도 협업 논의가 오가고 있다고 밝혔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대성공이다.

(왼쪽부터) 크로스앵글 박해민COO, 김준우 대표. 출처=정인선/코인데스크코리아

지난 8일 크로스앵글의 김준우 대표, 박해민 COO를 만났다. 주요 거래소들이 줄줄이 신생 기업과 협력에 나서는 이유가 뭘까. 두 사람은 “암호화폐 시장이 투자보다 투기 위주로 구성된 건, (ICO 등으로) 투자금을 모은 기업들이 ‘나쁜 놈’들이거나, 시장에 들어온 투자자들이 모두 불나방같은 투기꾼들이어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정보비대칭이 불가피한 지금의 구조를 바꿔내야 암호화폐 시장의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는 거래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기업공개를 할 땐 규제기관이 해당 기업의 자본금 규모와 매출과 운영상태 등을 검토해 요건이 맞으면 주식을 발행하도록 한다. 반면, 암호화폐는 이더리움 위에서 알아서 발행하면 된다. 그 탓에 기업들은 준비가 채 안 됐는데 시장이 너무 빨리 열려 버렸다. ICO(암호화폐 공개)와 거래소 상장 등으로 암호화폐 거래 시장은 대중에게 넘어왔다. 그런데 막상 기업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토큰에 어떤 내재가치가 있는지 등을 보여주는 정보들은 여전히 프라이빗 투자 단계에 머물러 있다.” -김준우 크로스앵글 대표

쟁글은 전통 주식 시장이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암호화폐 프로젝트를 평가한다. 각각 한국과 미국의 전자공시 시스템인 다트(DART)와 에드가(EDGAR), 국제 신용평가 기업 에스앤피(S&P)와 무디스(Moody’s), 피치(FITCH)등의 기업 평가 기준에 준하는 정보를 암호화폐 프로젝트들에게 요구한다.

다만, 여러 기준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평가할지는 암호화폐 프로젝트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점은 공시 시장 보다는 스타트업 투자 시장과 닮았다.

전통 증권 시장에서 쓰는 잣대를 암호화폐 프로젝트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다소 과하게 엄격한 것이란 시각도 있다. 지난 5월 개최한 쟁글 플랫폼 설명회에서도 이같은 질문이 나왔다. 블록체인 기술은 기존 산업의 기준을 들이대기엔 아직 쓸모마저 세상에 증명하지 못한 신생 기술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암호화페 프로젝트가 토큰 판매로 자금부터 모은 뒤 제품 및 서비스 개발에 들어간다. 일반적인 스타트업이 최소기능제품(MVP) 개발 등을 통해 단계별로 프라이빗 투자를 유치한 뒤, 성장세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을 대중에게 판매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블록체인 프로젝트 팀들이 규제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재단의 형태로 자금을 모으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기부를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당장 매출을 보여주진 못 하더라도, 사업성을 증명할 근거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분명 보여줘야 한다.” -김준우 대표

암호화폐 프로젝트에게 당장 매출을 내보이라 요구할 순 없어도, 약속한 시점까지 매출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근거는 투자자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게 크로스앵글의 생각이다. 박해민 COO는 호재성 이벤트로 토큰 가격의 일시적 상승을 노리는 등 “세련되지 않은” IR(투자자 대상 기업 홍보) 방식이 암호화폐 업계에 기승을 부린 것도, 프로젝트를 평가할 명확한 척도가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블록체인이기 때문에 기존 세상의 문법과 다르다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평가를 포기하고 ‘느낌적 느낌’으로 가격이 형성되도록 놔 둬선 안 된다.” -박해민 크로스앵글 COO

일반 기업과 달리 평가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온체인 데이터가 이에 해당한다. 박 COO는 “블록체인이 좋은 건, 전통 주식 시장에서라면 추적이 쉽지 않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암호화폐는 곧 위변조와 복제가 불가능한 디지털 토큰이기에, 소유자의 분포와 중요한 소유권의 이동 등과 관련한 정보를 프로젝트가 자발적으로 공개하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하다.

기업이 창출해내는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성과지표(KPI, key performance indicator)를 뽑아내기 쉽다는 점도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특징이다. 박 COO는 “플랫폼 블록체인 개발 팀이라면 얼만큼의 함수가 사용되고 있고 얼만큼의 댑이 올라가 트랜젝션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또 댑 개발 팀이라면 토큰이 얼마나 돌아가고 있는지 등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은 암호화폐 거래소가 상장 심사를 통해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평가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체 공시 제도를 도입하는 거래소도 증가하는 추세다. 암호화폐 프로젝트의 온체인/오프체인 분석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플랫폼 또한 기존에도 많았다. 비교적 후발 주자인 쟁글은 어떤 면에서 경쟁력을 가질까.

김준우 대표는 “공시와 공지는 구분해야 한다”면서, “거래소들이 제공하는 정보는 완결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단순 공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꼬집었다. 예를 들어 투자를 위한 의사결정에 A, B, C 등 3가지가 필요하다면, 이 모두가 다 있어야 공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자체적으로 제공하는 공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정보를 올리는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기업이 무슨 힘으로 암호화폐 프로젝트들의 자발적인 정보 공개를 유도해낼 수 있을까? 김준우 대표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을 말했다.

“기존 공시 시장엔 정부의 법적 강제라는 기제가 있다. 그런데 법은 관할권 안에서만 작동한다. 국가 단위를 뛰어넘는 암호화폐를 법으로 강제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시장 논리’라는,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국경을 넘어 통용되는 법칙을 통해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 -김준우 대표

김준우 대표는 정보의 투명성 정도가 토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전통 주식 시장에서는 불확실성을 무엇보다 큰 리스크로 간주한다”며, “불투명한 기업이라는 인상이 주식 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삼성전자와 같은 큰 기업들도 에스앤피 등 평가 기관의 정보 공개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암호화폐 시장에서도 프로젝트들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얻게 될 혜택과 그렇지 않았을 때 받게 될 손해가 분명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허위 공시 역시 시장 논리로 방지할 수 있다. 박해민 COO는 “쟁글이 제공하는 평가 보고서를 바탕으로 거래소들은 허위 공시 등 투자자를 기만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상장 평가 등급 하락, 또는 그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상장 폐지 등을 고려할 수 있다”라며, “암호화폐 프로젝트들에게 이보다 피하고 싶은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와 박 COO는 ‘관문’으로서 포털(portal)이 개별 거래소에 비해 갖는 우위가 분명 존재한다는 크로스앵글의 가설이 점차 맞아들어가고 있다고 자신했다. 크로스앵글과 협업하려는 거래소와 쟁글에 자발적으로 정보를 올리려는 프로젝트가 함께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쟁글이 요구하는 의무보다 암호화폐 프로젝트가 얻어가는 혜택이 커질 것이다. 프로젝트 입장에서도 정보를 꾸준히 공시하려면 일정 정도의 공임이 든다. 이를 개별 거래소에 따로따로 하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반면 쟁글 한 군데에만 꾸준히 공시하면, 쟁글과 협력하는 글로벌 파트너 거래소들에게 한꺼번에 자사 정보를 보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준우 대표

“암호화폐 시장의 현재 스냅샷만 보면 가치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가치투자에 관심이 없는 개미 투자자들로만 이 시장이 유지된다고 믿는다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시장엔 미래가 없다고 믿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반대 방향에 베팅을 했다. 시장이 장기적으로 성숙해 가고, 특히 기관투자자들과 페이스북을 비롯한 대기업이 참여하고, 또 정부 기관이 관심을 가질수록 이 시장도 가치측정이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본다.” -박해민 COO
정인선 한겨레신문 정인선 기자입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3년여간 코인데스크 코리아에서 블록체인, 가상자산, NFT를 취재했습니다. 일하지 않는 날엔 달리기와 요가를 합니다. 소량의 비트코인(BTC)과 이더리움(ETH), 클레이(KLAY), 솔라나(SOL), 샌드(SAND), 페이코인(PCI)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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