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전주용 동국대 교수는 서울대 전기공학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고, 미국 미시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과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을 거쳐 2016년부터 동국대 경제학과에서 미시금융과 게임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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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2013년 이후 주로 경제 및 금융권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 화폐·자산에 대하여 설명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초기에는 경제학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암호화폐와 분산원장의 관계와 그에 대한 개념, 그리고 채굴, 해시 등 관련 용어들의 의미를 설명하다가 정작 원래 말하고자 하던 내용은 꺼내지도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2017년 이후에는 학계, 정부 및 금융업권 공히 암호화폐에 대한 이해가 부쩍 향상되었음을 실감했다.

반면, 최근에는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관련 종사자들 사이에 명목 화폐(fiat money)에 대한 경제적 이해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페이스북이 리브라를 발표한 직후 나타난 폭발적 반응- 그것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물론, 리브라 발표 이후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러한 초기 반응이 무색할 정도로 지지부진한 흐름이 이어지는 상황이지만, 이 글에서는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관련 종사자들의 법정 통화(legal tender)에 대한 이해를 돕고, 한 경제 체제 내에서 화폐의 유통과 사회 제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경제 이론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고, 법적 지위도 불명확한 어떤 교환매개 수단이 자연발생적으로 명목 화폐로 이용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맨큐의 경제학 교과서에는 이에 대한 예로 태평양의 Yap 섬에서 통용된 fei(또는 rai)라고 불리는 돌을 이용한 화폐의 사례를 제시하지만, 비트코인 및 여타 가상 화폐야말로 이에 대한 가장 최신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체로는 무가치한 교환매개 수단이 명목 화폐로 유통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전제는, 사회 구성원 중 “일정 비율 이상의” 누군가가 해당 교환매개 수단을 화폐로 이용할 것이라는 기대가 “외부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비트코인 등장 초기 지금은 폐쇄된 “실크 로드” 등 범죄 사이트에서 “누군가”는 비트코인을 마약, 도박, 밀수 등 불법적 거래에 이용한다는 부분 또한 이러한 기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모형들은 주로 탐색이론(search theory)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명목 화폐의 출현과 유통 현상을 설명하는데 분명한 장점을 갖지만 한계도 있다. 우선, 지불 수단으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가격 변동성이 최소화돼야 하는데, 해당 모형들은 화폐 가치는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비트코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너무 높은 변동성으로 인하여 화폐로서의 이용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현재는 실물(commodity) 자산으로 간주되는 상황이다.

화폐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하여 인류가 이용해온 방법은 ①금, 미 달러화 등 기존 자산에 대해 가격을 고정(peg)시키는- 리브라를 비롯한 스테이블 코인이 이에 해당- 방법 또는 ②중앙은행을 통해 인플레이션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추어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방법이다. (최근 알고리듬을 이용하여 가치 안정성 구현을 시도하는 스테이블 코인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확장성 및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필자는 회의적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더 이상 ‘명목’ 화폐라고 부르기 어려우며 후자의 경우- 블록체인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중앙집중적인 신용통화 체계의 및 운용 주체에 대한 신뢰성이 요구된다.

또한, 위의 이론 모형들은 국가가 특정 교환매개 수단을 지정하여 법정 통화라는 특수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명확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법정 통화는 특정 교환매개 수단- 가령 금, 은 등-이 해당 국가에서 유일한 조세 납부 수단으로 인정됨에 따라 갖게되는 법적 지위로 해석할 수 있다. 법정 화폐는 다른 잠재적 화폐 후보군들을 물리치고 통화의 독점을 이룰 수 있게 했으며(법정 화폐의 도입에 따른 통화의 중앙화는  “누군가” 지불수단으로 사용할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는 점에서 탐색 이론 기반 화폐모형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현재의 명목/불태환(inconvertible) 화폐가 등장하게 된 기반이 되었다.

또한, 2011년 노벨상을 수상한 크리스토퍼 심스(Sims)는 이러한 접근을 보다 확장하여 미국의 통화신용 체계는 “조세기반 화폐 체계(tax-based monetary system)”라고 정의한다. 즉,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각각 조세와 달러로 표시하고, 미 국채를 매개로 정부의 조세징수권과 중앙은행의 달러화 발권을 연결시켜 화폐체계가 조세에 기반한 화폐발행 및 화폐가치 유지 체계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세권을 가진 정부와 중앙은행이 운용하는 통화신용 제도가 없다면 현재와 같은 명목 법정 화폐의 체계적 통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연구 목표와 관점은 전혀 다르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자 수잔 드 브뤼노프(Suzanne de Brunhoff)도 화폐가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탄생하게 된 특수한 상품이라는, 결과적으로 유사한 해석을 제시한다.)

페이스북의 리브라는 실제 온라인 거래에서의 통용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화폐의 가치 안정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탈중앙화된 운용 역시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스테이블 코인 형태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가격 안정성 유지를 위한 금본위제-고정환율제는 이미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말을 거치며 위기 및 투기적 공격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취약하다는 점이 경제학에서 지적되었으며, 이는 92년 조지 소로스의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공격에서 실제로 확인되었다.

(유로화 도입 이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ERM(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이라 지칭되는 당시 독일(서독) 마르크화 대비 환율 변동폭을 일정 구간 내로 제한한 환율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89년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의 재정지출이 증가하였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독일은 이자율을 급격히 상승시켰다. 당시 영국 경제가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는데, 마르크화 대비 파운드화의 하방 압력이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소로스(퀀텀펀드)는 92년 차입을 이용하여 대량의 파운드화를 매도하였고 다른 헤지펀드들이 이에 가세하도록 선동하였다. 영국은 파운드화에 대한 방어에 나섰지만 천억달러가 넘는 손실을 입고 결국 ERM을 탈퇴하였다.)

미 하원 청문회에서 밝혔듯이 페이스북은 리브라를 주권국가의 통화와 동등한 지위로 끌어올리거나 명목 화폐 형태로 운영할 의지가 없음을 확실히 밝혔으며, 또한 밝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즉, 법정 통화와 대체관계의 통화로 이용되기에는 시작부터 취약점을 안고 있다.

페이스북은 대신 금융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리브라, 그리고 제공되는 월릿 서비스인 칼리브라(Calibra)를 통한 대안적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가들의 경우 리브라와 칼리브라를 이용하기 위한 적절한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가 확보되어있을 가능성 또한 높지 않다. 무엇보다도 공식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미 달러화가 이러한 국가의 통용화폐로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리브라가 이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리브라의 유용성은 국제간 거래에서의 통용에 있을 수 있지만, 리브라가 페이스북 서비스와 캘리브라 바깥을 벗어나는 순간 각국의 각종 금융 규제와 맞딱뜨려야 할 것이며, 이는 리브라의- 그리고 국제 송금에 이용되는 40년이 넘은 스위프트(SWIFT) 네트워크를 대체하고자 하는 리플(Ripple, XRP)을 비롯한 모든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들도 마찬가지로- 동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대부분의 경제학 전공자들과는 달리 필자는 리브라를 비롯하여 주요한 암호화폐들은 충분히 장기적으로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암호화폐의 국경간 이동에 대한 규제 및 통제에 대하여 주요국 정부들의 컨센서스가 있다면, 페이스북과 같은 초국적 플랫폼의 신용에 연결되고 가치 변동성이 적게 설계된 암호화폐는 해당 플랫폼 내에서 화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암호화 자산들의 움직임 또한- 기존의 다른 금융 자산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수행하는데 고려해야 할 요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리브라에 대한 과도한 기대 혹은 우려를 보면서 법정 화폐를 비롯한 기존의 통화신용 시스템에 대해서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관련자들의 이해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은것이 사실이며, 이에 대한 이해가 더 나은 블록체인 및 암호화 자산 시스템의 설계에도 유용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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