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가 아닌 해상에서 선박 간에 화물을 옮기는 것은 북한이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인 거래 방법이다. 출처=셔터스톡
항구가 아닌 해상에서 선박 간에 화물을 옮기는 것은 북한이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인 거래 방법이다. 출처=셔터스톡

북한은 수많은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출입 거래를 지속하고 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한다. 15억 달러(약 1조8천억원) 규모의 암호화폐를 각종 불법 거래와 수출입 활동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암호화폐 분석 업체 체이널리시스(Chainalysis)는 최근 한 화상회의에서 "북한의 암호화폐 은닉 규모는 15억 달러로, 지난해보다 2~5억 달러 증가했다”고 밝혔다.

체이널리시스의 정책 및 규제 담당 총괄 제시 스피로는 “북한의 불법 암호화폐 자금이 무역을 통한 자금세탁에 유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여기서 핵심 문제는 제재를 받는 국가로 자금이 들어오고 나간다는 점인데, 북한의 경우 이 자금을 암호화폐로 충당하는 게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선임연구원이자 리코디드퓨쳐의 위협국가 전략개발팀장 프리실라 모리우치는 미국 법무부가 최근 북한 국경을 넘다 적발된 중국인 두 명을 총 1억 달러 규모의 암호화폐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한 사례를 지적했다. 그는 “여러 정황으로 비추어볼 때 북한은 각종 무역 거래에 암호화폐를 이용하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하다"며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 자료는 아직 수집 단계에 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셈이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체이널리시스도 북한 해커들이 빼돌린 암호화폐가 각종 거래소로 유입된 정황을 포착했다. 그러나 모리우치와 마찬가지로 이들 암호화폐가 무역 거래에 이용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연결고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

“북한의 암호화폐 유용에 대해 미국 정부의 강도 높은 조사와 제재가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난다 해도 우리가 논의해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 제시 스피로

미국 재무부와 법무부는 이와 관련한 코인데스크의 문의에 답하지 않았다.

 

유용한 제재 회피 수단

이른바 선박 간 무역 거래, 곧 항구가 아닌 해상에서 선박 간에 화물을 옮기는 것은 북한이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인 거래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는 선박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자동식별장치(AIS)의 전원을 끄거나 편의치적선(flag of convenience)을 이용하기도 한다. 편의치적이란 선박의 국적을 제3국으로 등록함으로써 본국이 요구하는 엄격한 법률을 피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지난해 3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은 보고서를 내고 “석유와 석탄의 선박 간 무역 거래 비중이 대폭 증가했다”며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과 관련한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을 의식한 행동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선박 간 무역 거래와 함께 암호화폐 등을 이용한 사이버 거래도 제재를 피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2017~2018년 북한의 암호화폐 거래소 해킹 시도는 최소 5건 이상 성공했다. 거래소 해킹 외에도 랜섬웨어 공격이나 직접 채굴 방식을 통해 암호화폐를 수집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암호화폐의 익명성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를 고려하면, 근래에 채굴된 암호화폐일수록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 유엔 안보리 전문가패널 보고서

영국의 안보 분야 싱크탱크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카일라 아이젠만 연구원은 “북한은 각종 자원 및 물품 구매에 암호화폐를 이용하고 있다”며, “이는 북한에 대한 국제 제재로 엄격히 금지된 행위”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거래대금 지급 용도 외에도 법정화폐로 전환하는 목적으로 암호화폐를 이용하거나 토큰 가격이 오를 것에 대비해 암호화폐를 그저 쌓아두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래가 금지된 사치품도 암호화폐로 구매했다. 또 물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운송회사나 중개업자에게도 암호화폐로 대금을 지불했다. 이들 중개업자는 북한이 해산물 같은 물품을 수출하거나 노동자를 파견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어떻게든 비용은 지불해야 한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마땅한 결제 수단은 암호화폐밖에 없어 보인다.”

이처럼 북한이 암호화폐를 무역 거래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 은행에 대한 자금 지원 의존도가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강력히 이행하기 위해 중국 시중 은행에 대한 고강도 압박을 이어왔다. 암호화폐를 이용하면 대량 운반 시 적발 위험이 높은 현금을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북한에는 매력적일 수 있다. 일례로 지난 2018년 10월, 북한 선박이 18만 달러어치 지폐를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고 옮기다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세관에서 적발된 적이 있다.

 

탄탄한 구도

북한의 주 수입원인 석탄 수출을 제재하려는 시도는 지난 2016년부터 계속됐다. 석탄을 수출해 북한이 1년에 벌어들이는 돈은 10억 달러, 약 1조 2천억 원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면직물(7억 6천만 달러)이나 해산물(3억 달러), 철이나 연광석(3억 6천만 달러)을 수출하는 데 대한 제재는 약하게 적용돼왔다.

“이러한 수출입 거래에 암호화 등 북한의 고난도 기술이 접목될 수 있다. 북한의 암호화 기술은 이란이나 베네수엘라 등 미국의 제재를 받는 다른 국가보다 훨씬 뛰어나다. 북한은 각종 물품 수출에 암호화폐를 활용하는 방법을 꽤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즉, 해킹으로 훔친 암호화폐를 제재 회피 수단으로 사용하는 구도가 탄탄하게 잡혀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북한의 교육 시스템도 한몫한다. 북한 내 여러 기술대학은 유능한 해커 양성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전국에서 모인 수백 명의 학생이 오직 유능한 해커가 되는 것을 목표로 교육을 받는다. 다른 나라보다 해킹 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따라서 북한이 고난도 암호화 기술을 각종 불법 거래와 수출 네트워크에 사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 카일라 아이젠만,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연구원

북한은 지난해 4월 평양에서 블록체인·암호화폐 콘퍼런스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행사에 참석한 이더리움 핵심 개발자 버질 그리피스는 귀국 후 국제긴급경제권한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북한은 올해도 원래 지난 2월 콘퍼런스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연기했다.

 

마린체인 프로젝트

앞으로 북한이 블록체인 기술을 어떤 식으로 불법 거래에 연계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은 이더리움 기반 프로젝트 마린체인(Marine Chain)을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린체인은 선박의 소유권을 토큰화하는 프로젝트로 지난해 유엔 안보리 보고서에도 언급되었다. 앞서 2018년 10월 안보리 대북제재위 전문가패널은 홍콩에 등록엔 마린체인 프로젝트를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북한 인사가 지원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프로젝트가 실제로 진행되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ICO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려는 술책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유엔 측에서 접촉을 시도하자 해당 인사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마린체인 프로젝트는 북한 정권이 자금을 마련하는 수단인 동시에 선박의 소유권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각종 물품 운송에 대한 제재 회피 수단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 유엔 안보리 전문가패널 보고서

**편집자 주: 북한은 암호화폐 관련 범죄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거래소 해킹 등으로 20억달러 규모의 암호화폐를 빼돌렸다는 지난해 유엔 안보리 전문가패널 보고서와 관련해, 북한은 성명을 내어 "적대 세력들의 이러한 모략 날조 행위는 우리 공화국의 영상(이미지)을 깎아내리고 대조선제재압박소동의 명분을 세워보려는 치졸한 놀음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 있다.

Ian Allison 이안 앨리슨 기자는 코인데스크에 합류하기 전 와 에서 핀테크 분야를 담당했다. 2017년 스테이트 스트리트 데이터 혁신 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한 앨리슨 기자는 DAO 토큰을 소량 구매했었지만, 이를 회수하지는 않았다. 앨리슨 기자는 현재 암호화폐나 블록체인 프로젝트 어디에도 투자한 자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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