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후드. 출처=Andrew Neel/pexels
로빈후드. 출처=Andrew Neel/pexels

'의적' 로빈후드(Robinhood)는 이번에도 이름값을 했다. 그러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진 않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다.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자산 규모가 80억달러에 이르는 헤지펀드 멜빈 캐피탈(Melvin Capital)은 게임스톱(GameStop, GME) 주식에 공매도 주문을 걸었다가 엄청난 규모의 손해를 봤다. 1월에만 포트폴리오의 53%가 증발해버렸다. 액수로 환산하면 70억달러 규모.

레딧(Reddit)에 모인 개인투자자들이 맹렬하게 게임스톱 주식의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숏스퀴즈에 나섰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멜빈 캐피탈의 게이브 플랏킨 창립자는 전에 다니던 회사의 상사에게 구제금융을 부탁하며 손을 벌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플랏킨의 전 직장 상사는 스티븐 코헨으로, 코헨은 멜빈 캐피탈에게 28억달러를 급히 지원했다. 메이저리그 야구팀 뉴욕 멧츠 구단주이기도 한 코헨은 SAC 캐피탈(SAC Capital)의 회장을 지냈다. 최근 SAC 캐피탈은 내부자 거래 혐의로 당국에 18억달러를 벌금으로 냈다.

시타델(Citadel) 헤지펀드와 시타델 증권사를 소유한 켄 그리핀도 멜빈 캐피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헤지펀드는 멜빈 캐피탈에 직접 투자했다. 시타델 증권사는 로빈후드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주요 마켓메이커 가운데 하나로 로빈후드 고객들이 낸 주문을 받아 청산한다. 헤지펀드의 자금이 증발하듯 큰 손해를 보자, 워싱턴 DC에선 시타델 증권사의 이해관계가 걸린 분야의 시장 구조를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로빈후드 자체는 어떻게 봐야 할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로빈후드는 월스트리트의 일원이 아니라, 실리콘밸리 기업에 가깝다. 문제가 불거져 집단소송 가능성이 제기되자, 로빈후드는 순식간에 10억달러를 모았다. 소송전이 벌어지면 필요할 실탄을 채워둔 거다. 로빈후드의 제휴사인 DTCC나 DST 글로벌의 유리 밀너 등도 부랴부랴 로빈후드에 적잖은 돈을 마련해줬다.

최소한 방금 언급한 4명에겐 분명 이번 게임스톱 사태가 악몽 같은 일이었다.

반대로 레딧의 월스트리트벳츠(WSB) 서브레딧 회원 수는 800만명, 로빈후드 고객은 1300만명이다. 이들에겐 게임스톱 사태가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억만장자라고 다 악몽 같은 나날을 겪은 건 아니다. 세계 최고 부자가 된 일론 머스크는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를 칭송하고 나섰고, 페이스북 출신의 억만장자 차마스 팔리하피티야도 레딧의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해 맞춤형 전략을 세운 단타 투자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 게임스톱을 공매도했다가 손해 본 데 말고 탈중앙화된 헤지펀드들도 적잖은 이윤을 챙겼다. 이번 사태에서 중요한 건 돈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다.


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의 정체성, 혹은 당신의 행적에 따라 편이 갈린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느 쪽인가? 인터넷을 통해 뭉친, 이름 없는 영웅 개미들인가? 냥 캣 같은 밈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기득권을 향해 "부자 놈들 돈을 더 털어버리자. 계속 돈을 찍어라, 우리 수익은 계속 오를 거야!" 같은 말로 일격을 날리며, 진상 부리는 자들에게 속 시원하게 욕을 날려주는 쪽인가? 욕먹어도 싼 그런 작자들에게 속 시원히 욕을 날려주고 나면, 사이다도 그런 사이다가 없다. 뇌하수체에서 도파민이 마구 샘솟는다.

아니면 모름지기 금융, 재정 관리는 이 분야를 잘 아는 전문가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당국의 승인을 받고 진행하는 게 안전하고 바른 일이라고 믿는 쪽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금융 전문가는 어떤 사람인가? 아마도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들일 거다. HYP(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가운데 한 곳을 나왔을 테고, 학위도 하나로는 성에 안 찼을 테니 둘 이상은 갖췄을 거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유수의 회사를 거쳤으며, 지금은 당신의 소중한 자산을 관리하는 엄청난 금융기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방금 몇 가지만 나열한 금융 엘리트의 전형에 관한 신화, GMAT(미국 경영대학원(MBA) 입학시험), SAT(미국 대학 입학자격시험)같은 시험을 통해 선발하고 육성한 재원들이 모여 구축한 단단한 기득권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벽에 금을 내고 기어이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니라 이 똑똑한 사람들이 가장 잘 다룬다고 믿었던 돈의 논리였다.

한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갈 건 월스트리트나 실리콘밸리, 아니면 인터넷, 비트코인, 디파이(DeFi), 심지어 게임스톱에 관해서도 특정 사실 몇 가지가 이번 사건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의 단어나 분류법들은 우리의 다양한 집단에 붙은 표식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끼리 전쟁을 벌이고 있다.

게임스톱은 비디오게임을 파는 가게다. 쇼핑몰에 가면 한구석에 자리 잡은 게임스톱에선 비디오게임 팩이나 CD를 살 수도 있고, 대여할 수도 있었다. 쇼핑몰의 규모를 불문하고, 꼭 하나씩 있던 비디오 대여점(블록버스터, Blockbuster)이나 책가게(보더스, Borders)는 진작에 망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아이템은 인터넷이라는 트렌드에 정확히 올라탄 넷플릭스나 아마존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지금은 사라져버린 서비스의 브랜드 이름은 수많은 이들의 옛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게임스톱도 스팀(Steam)이나 에픽(Epic)을 비롯해 소위 요즘 게임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두 브랜드는 이미 전 세계 게이머들로부터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즉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브랜드 또는 현상에 연명 장치를 억지로, 그것도 너무 과하게 달아놓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당연히 나올 만하지만, 어쨌든 게임스톱은 하나의 상징이자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이라는 말이다.

 

전통 금융권과 펀더멘털

어떤 사업의 전망을 분석할 때는 이른바 펀더멘털(fundamentals)이 중요하다. 경제학 원리대로 게임스톱을 분석해보면, 당연히 펀더멘털에 부정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자본이 오가는 금융시장에서 돈을 어디에 투자하고 어떻게 옮길지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준거가 펀더멘털이다.

워런 버핏은 펀더멘털이 좋은 기업의 주식은 사고, 그렇지 않은 기업의 주식은 팔라고 말했다. 유명인 워런 가운데 펀더멘털을 신봉하는 사람은 또 있다. 매사추세츠의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이다. 워런 의원은 정부가 펀더멘털을 토대로 "공정하고, 질서 잡힌, 효율적인" 기준을 만들어 시장과 기업을 규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펀더멘털에 관한 이야기는 다 맞다. 또 우리가 케인즈 이론의 아성이나 그가 말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 자체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워런 버핏은 이제 더는 세계 최고가 아니라는 건 짚고 가야 하겠다. 지금 우리는 누가 뭐래도 일론 머스크 시대에 살고 있다.

금융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펀더멘털을 입에 달고 산다. 반대로 인터넷의 펀더멘털이 어떤지 신경 쓸까? 전혀 안 쓴다. 인터넷은 대신 특정 세력이나 권력에 복속되는 걸 두려워한다. 머스크와 차마스는 전형적으로 인터넷의 특징과 속성을 체화한 사람들이다.

전례 없이 폭등한 게임스톱 주가와 관련해서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게임스톱의 사업에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어 정말로 순식간에 시가총액이 3천만달러 이상 급증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시장의 구조다.

이번 거래는 애널리스트들이 예기치 못한 실적 발표나 사업상의 호재 또는 악재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멜빈 캐피탈이 왜 숏스퀴즈를 할 수밖에 없게 됐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멜빈 캐피탈이 (주가가 내릴 것으로 예상해 주식을 빌려 판매하는) 공매도를 하지 못하게 주식의 공급을 극도로 줄여버렸다. 주가가 폭등하자 공매도를 유지하기가 엄청나게 비싸졌고, 멜빈 캐피탈은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숏스퀴즈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숏스퀴즈란 주가가 급격히 오르면 매도 포지션에 있던 투자자가 손실을 메꾸려고 급히 자산을 매수하는 상황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건 액셀 스프레드시트 위에 이런저런 숫자를 집어넣고, 모델을 돌려보는 싸움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두고 벌이는 경쟁이다. 멜빈 캐피탈뿐 아니라 수많은 헤지펀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게임에 참여하게 됐다.

금융 시장에 관련한 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시장의 기본적인 구조를 맹신하지 않고, 실제로 시장이 작동하는 원리를 연구하고 시험해야 한다. 그런데 월스트리트벳츠(WSB)도 대담하게 이 경쟁에 불쑥 뛰어들었다. 개인투자자들은 원래 이렇게 적극적으로 조식해서 전략을 짜지도, 그런 전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고, 그래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공매도 포지션을 건 상태에서 숏스퀴즈를 하려면 멜빈 캐피탈은 돈을 빌려야 했다. 돈을 빌리려면 이자를 내야 한다. 그리고 숏스퀴즈를 하려면 당연히 주식을 되사야 한다. 그러니까 멜빈 캐피탈은 이자도 내고, 주식도 사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 아무도 멜빈에 주식을 팔지 않는다.

왜? 헤지펀드를 곱게 보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 오히려 멜빈을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듯, 모두가 주식을 사들인다. 값이 계속 더 오를 거라며 돈을 빌려 옵션까지 산다. 주가가 끝없이 오르는 데 모든 걸 다 거는 형국이다. 멜빈의 선택지는 공매도로 인한 손실을 메꿀 때까지 더 큰 손해를 보면서도 남은 힘을 다 동원해 숏스퀴즈를 이어가는 것밖에 없다.

로빈후드는 브로커딜러다. 로빈후드는 월스트리트가 아닌 실리콘 밸리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실리콘 밸리에선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 물론 소비자들이 훨씬 더 값어치가 큰 것을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에 공짜로 주기 때문에 서비스가 무료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됐다.

즉 소비자들이 그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드러내는 취향, 수요, 각종 정보를 기업들은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모아서 광고주들에게 (서비스 제공 비용을 대고도 남을 훨씬 비싼 값에) 판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돈을 버는 사업모델이 딱 이렇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서비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분명 편리하고 윤택해졌지만, 동시에 '내 건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도 많아지는 등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침해당했다.

 

출처=로빈후드 페이스북 캡처
출처=로빈후드 페이스북 캡처

수수료 받는 대신 사용자 데이터를 팔아먹는 로빈후드의 수익모델

로빈후드는 '수수료 제로'를 마케팅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수수료 없이 거래하는 대가로 이용자는 로빈후드에 나의 수요에 관한 정보를 그냥 건네준다. 로빈후드는 이렇게 모은 소비자들의 수요 정보를 시타델 증권사 같은 데 보낸다.

개인의 수요를 한데 모아놓고 분석해보면 시장의 흐름이 한눈에 보인다. 시타델은 소비자들의 수요 정보를 받아보고 로빈후드에 6억달러를 지급한다. TD 아메리트레이드(TD Ameritrade)나 이트레이드(eTrade) 등 저렴하거나 무료 수수료를 앞세운 브로커들의 사업 모델도 비슷하지만, 로빈후드가 이런 일을 가장 잘한다.

이런 사업 모델과 거래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건 전혀 아니다. 미국의 금융·자본 시장의 구조가 그렇고, 똑똑한 투자자들이 기민하게 차익거래의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다만 이는 소비자들이 시타델 증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해 최상의 효용을 얻을 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 구조는 현대의 기술 표준 관점에서 보면 아주 낡았다. 실시간은커녕 거래가 청산되기까지 보통 이틀이 걸린다. 주요 거래소에서 주문을 모아 서로 짝을 맞춰 청산하는 기능을 '청산소(clearing house)'에 맡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빈후드는 이 기능을 제휴사 DTCC에 맡겼다. 인터넷에 모인 투자자들은 게임스톱의 주가를 천정부지로 뛰게 밀어 올렸다. 마치 조지 소로스가 잉글랜드은행을 공격할 때를 연상시켰다. 이런 공격을 막는 데 필요한 자본이 순식간에 열배 더 많아졌다.

로빈후드와 TD 아메리트레이드는 마련할 수 있는 돈으로 공격을 막아낼 수 없게 되자, 끝내 거래 자체를 제한해버렸다. 아직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 사업 초기 단계로, 매년 수십억달러를 투자받아서 한창 몸집을 불리고 있는 회사가 갑자기 기존에 책정한 것보다 열배 많은 돈을 마련할 길은 없다. 로빈후드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제 단 하나. 수요가 폭증한 그 자산의 매수(Buy) 버튼을 지워버리는 거다. 매도(Sell) 버튼은 그대로 뒀다. 당연히 인터넷에서는 로빈후드를 겨냥한 음모론이 들끓었다.

주식을 사지는 못하고 팔 수만 있게 하다니, 이런 지시는 시타델의 억만장자들이 내린 걸까? 개미들을 농락해 크게 한탕 챙기려는 금융권 세력의 음모인가? 월스트리트의 기득권이 모바일 앱을 이용해 거래하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건가? 이건 헌법도 보장한 자유인데? 좌우를 가릴 거 없이 모두가 로빈후드의 결정을 비난했다. 오죽했으면, 정치적 의견이 아마 가장 상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테드 크루즈(공화, 텍사스) 상원의원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아 코르테즈(AOC, 민주, 뉴욕) 하원의원이 같은 대상을 비난했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로빈후드를 비난했지만, 또 그렇다고 전 국민이 비난 대열에 동참한 건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건 핀테크, 즉 로빈후드나 레볼루트(Revolut), 소파이(SoFi) 등이 대표하는 분야는 금융 서비스의 민주화를 촉진하고 앞당기는 일을 소명처럼 여겼다는 사실이다. 금융 민주화라는 말은 10년 전만 해도 별 의미 없는 말이었다. 뭘 잘 모르는 "어리석은 돈(dumb money)"은 정보도 제대로 얻지 못하다 쉽게 공략당해 사라졌다.

이제 누구나 공짜로 정보를 얻는다. 주식 거래에도 거의 드는 비용이 없고, 버튼 하나만 클릭하면 어떤 자산이든 쉽게 사고파는 세상이다. 요즘엔 숫자를 제대로 분석해서 그 숫자가 가리키는 바를 잘 아는 사람이 결국 승자가 되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직접 더 쉽게 행동을 조직할 수 있게 됐다. 그 점이 금융에서 가장 무서운 점이다.

여기에 더해 지금은 암호화폐 생태계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 핀테크가 돈과 자원의 분배에 관한 기술이라면, 블록체인은 (새로운 형태의) 돈을 주조하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이더리움상의 트레이더나 마켓메이커라면 (중앙에서 운영하는) 청산소가 필요 없다. 브로커딜러도 없어도 된다.

당신과 자동화된 규칙의 묶음인 스마트계약으로 돌아가는 탈중앙화 기계들, 그리고 소프트웨어로 확인하는 재산권 개념만 있으면 청산소 없이도 거래가 얼마든지 진행된다. 심지어 모든 게 실시간이다. 변호사와 로펌들이 며칠씩 달려들어 작성하고 공증하고 교차 검증해야 하는 서류 한장 없이도 거래 기록을 담은 블록이 차곡차곡 줄을 맞춰 쌓인다. 이미 블록체인의 고유 화폐인 암호화폐를 이용해 본 사람이 전 세계에 수백, 수천만명에 이른다. 이들의 머릿속에선 중개업체 없는 금융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더리움에도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당장 지금 이더리움은 거래 수수료가 너무 비싸다. 적게는 10달러, 많게는 100달러 가까이 든다. 여기에 거래가 청산되지 않으면 추가 수수료 1%가 더 든다. 정확히 얼마라고 측정하긴 힘들지만, 사이버 해킹의 위협도 분명히 있고, 규제당국이 언제 강도 높은 규제를 들이밀어 새로운 산업을 억누르려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더리움에선 그 누구도 '매수' 또는 '매도' 버튼을 없앨 수 없다. 또 거래 속도나 수수료, 확장성 문제는 단지 기술적인 부분으로 언젠가는 해결될 일이다.

출처=로빈후드 페이스북 캡처
출처=로빈후드 페이스북 캡처

금융민주화 이후의 세상

핀테크든 암호화폐든 언젠가 일어날 금융의 민주화 이후의 세상을 그려보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한다. 우리의 본성이 그렇다. 우리는 공정이라는 개념을 진화를 거치며 다듬어왔다. 공정 혹은 공평한 가치는 수십억명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협동을 가능하게 한 기준이었다.

민주주의는 과두정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1인 1표의 가치와 동일시한다면 지금까지 금융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금융의 기준은 1인 1표보다도 1원 1표였기 때문이다. 1원 1표의 세상과 1인 1표의 세상은 당연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1원 1표의 세상에서 1인 1표의 이상향을 추구하자고 외치던 선구자 혹은 괴짜들이 있었다. 로빈후드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개인도 복잡한 금융상품을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하는 약속이 정확히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궁금해한다. 약속이 현실과 괴리가 있을 때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사람들은 트위터나 레딧으로 모여든다.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변화를 원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려는 동력이 생긴다. 일론 머스크가 대표적이다. 가뜩이나 위대한 테슬라가 가는 길에 자꾸 재를 뿌리려는 공매도 세력들이 싫던 머스크다. 가끔은 이들이 시장을 조작하는 건 아닐지 의심도 들던 차였다.

차마스 팔리하피티야도 실리콘 밸리의 핀테크 기업들이 내건 약속들이 어디까지 믿을 만한 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소파이 같은 핀테크 회사들을 인수해 우회상장하려고 SPAC을 수도 없이 세운 사람이 차마스다. 기존의 구조에 균열이 생겼다. 이 구조를 무너뜨릴 기회가 온 거다.

디스토피아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 피터 터친은 10년 전에 엘리트가 넘쳐나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즉, 우리 사회가 지배 계급을 너무 많이 배출하면 이른바 엘리트 과잉이 불만과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고학력자가 너무 많아지다 보니, 박사, MBA, 기업가 가운데 전임자들이 은퇴한 뒤에 그 자리를 물려받지 못하는 '잉여'가 많아졌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규정하며 기득권, 이른바 인사이더를 공격하는 포퓰리즘 대열에 합류한다. 그 방식도 물론 대단히 정교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인 예다.

당신이 현재 기득권을 쥐고 있다면, 레딧에 모인 사람들이 헤지펀드를 향해 쌓인 분노를 표출한 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 시스템의 끝단을 슬쩍 비틀어놓는다.

현재 작동 방식에서 생겨나는 부수적인 오류를 덮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구글은 최근 로빈후드를 향해 쏟아진 부정적인 리뷰 10만개를 이용자가 직접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제했다.

로빈후드를 향한 비판은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조율해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용자가 리뷰를 직접 쓰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현재 적용된 게임의 법칙을 따르면 실제로 이용자가 썼든 안 썼든 저 리뷰 10만개는 진짜가 아니다. 펀더멘털을 따진다면, 시장 구조나 "원래 세상이 그렇다"는 설명을 따르면, 로빈후드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

멜빈 캐피탈도 기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 놓고 본다면 불법 행위를 한 것이 없다. 이들은 게임의 법칙을 충실히 활용했을 뿐이다. 그 법칙을 수많은 사람이 경멸하게 됐지만.

구글 앱스토어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기득권이다. 앱스토어의 이용 약관에 따르면 해야 할 일, 해선 안 되는 일을 사실상 구글이 다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스템을 믿는 이들에겐 로빈후드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면 로빈후드의 평판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다.

TD 아메리트레이드를 비롯해 게임스톱 거래를 제한하고 정지한 다른 브로커들은 로빈후드만큼 비난을 받지 않았다. 왜 그랬을지 생각해보면 이유는 자명하다. 로빈후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거래 서비스가 될 거라는 약속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낡은 도구를 이용하는 한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번역: 송인근/뉴스페퍼민트

Lex Sokolin Lex Sokolin, a CoinDesk columnist, is a futurist and entrepreneur working on the next generation of financial services. He is the Global Fintech Co-Head at ConsenSys, a blockchain technology company building the infrastructure, applications and practices that enable a decentralized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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