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데스크 코리아는 앞으로 '암호화폐' 대신 '가상자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현재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이 사실상 화폐보다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어에 대한 재논의 시점은 이들의 사회적 성격이 달라졌을 때입니다.

출처=bitcoin.org 캡처
출처=bitcoin.org 캡처

가상화폐, 암호화폐, 가상자산, 디지털자산, 암호자산. 한국어로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을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다. 다섯개나 된다는 건 아직도 이 새로운 것의 정의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08년 비트코인 백서가 나오고 다음해 비트코인이 채굴되기 시작했으니, 12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것의 개념과 성격을 파악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다들 화폐라고 불렀다. 익명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의 의도는 전자화폐였기 때문이다. 백서 제목은 ‘비트코인: 개인간 전자화폐 시스템’이다. 요약에는 ‘완전한 피투피(P2P) 전자화폐는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온라인 결제를 구현한다’고 쓰여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정부의 감시나, 은행의 통제 없이 전세계 누구와도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전자화폐’. 사토시 나카모토가 꿈꿨던 비트코인의 미래였다.

비트코인을 영어로 크립토커런시(cryptocurrency·암호화폐)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토시가 사이퍼펑크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암호화를 뜻하는 사이퍼(cypher)와 저항(punk)을 더한 단어로, 1980~1990년대 컴퓨터와 암호화 기술로 정부의 검열과 통제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중요 가치로 여겼다. 사이퍼펑크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의 프로그래머 고 티머시 메이는 1988년 공산당 선언을 본뜬 ‘암호화 무정부주의자 선언’을 썼다.

그는 2018년 “우리가 왜 처음에 비트코인에 열광했나? 거래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우회해 무력화하고, 실크로드 같은 시장에서 개인과 개인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거야말로 정말 멋지고 진짜 혁신이다. 페이팔의 아류를 만드는 데는 분산원장 기술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정부의 감시와 통제 아래 있는’ 페이팔은 비트코인을 사고팔 수 있는 서비스를 추가했다. 그러자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했다. 페이팔이 올해 전세계 가맹점 2900만곳에서 비트코인으로 결제하는 기능을 추가하자 가격은 또 올랐다.

페이팔과 같은 세계 최대 결제기업이 비트코인을 받아들인 건 호재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가격이 오르자 더 많은 투자자가 포트폴리오에 비트코인을 추가했다.

비트코인 탄생과 깊게 연관된 사이퍼펑크 프로그래머: 사토시 나카모토, 핼 피니, 데이비드 차움, 티머시 메이. 투자자산으로 비트코인을 바라보는 금융IT 인사들: 잭 도시, 마이클 세일러, 일론 머스크, 레이 달리오. 출처=한겨레신문
비트코인 탄생과 깊게 연관된 사이퍼펑크 프로그래머: 사토시 나카모토, 핼 피니, 데이비드 차움, 티머시 메이. 투자자산으로 비트코인을 바라보는 금융IT 인사들: 잭 도시, 마이클 세일러, 일론 머스크, 레이 달리오. 출처=한겨레신문

사토시 나카모토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야기한 금융권과 정부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비트코인 블록체인의 첫번째 블록에 남겼다. 하지만 이제 블록체인 업계에서 미국 월가의 금융기관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반대다.

캐시 우드, 스탠리 드러큰밀러, 폴 튜더 존스 등 월가의 대가들이 비트코인에 우호적인 발언을 할 때마다 가격이 오르고 시장은 환호했다. 미국 최대 코인 거래소 코인베이스는 지난 4월 나스닥에 상장했다.

사이퍼펑크는 비트코인으로 금융기관을 대체하려 했으나 이제 비트코인은 월가의 투자자산 중 하나로 전락했다. 트위터 창업자 잭 도시와 같이 여전히 “비트코인 혁명”을 외치는 이들도 있지만, 비트코인은 사이퍼펑크의 무기 혹은 은행계좌가 없는 전세계 17억명 성인을 위한 글로벌 화폐가 되지는 못했다. 이제 비트코인을 사는 대다수는 감시와 통제는 큰 관심이 없고, 얼마나 더 오르느냐를 묻는다.

일본은 2019년 법적 용어를 가상통화에서 암호자산으로 개정했다. 지급결제에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비트코인 등을 정의하는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도 화폐가 아닌 가상자산으로 규정한다.

사실 페이팔이 도입한 '비트코인 결제'도 가맹점에 비트코인을 주는 게 아니다. 페이팔이 소비자의 비트코인을 미국 달러 등으로 바꿔 이를 가맹점에 건네준다. 이름만 '비트코인 결제'인 셈이다.

게다가 비트코인을 받으려는 가맹점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2013년 이후 국내에서도 비트코인을 받는 빵집, 음식점 등이 일부 등장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대신 국내 코인 거래소에 가입한 투자자는 600만명을 넘었다.

비트코인은 창시자의 손을 떠났고 수용자들은 투자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제 비트코인에서 화폐라는 이름을 떼어줄 때가 온 것 같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 지면에도 게재됐습니다. 코인데스크 코리아는 한겨레신문 오피니언 코너 '헬로, 블록체인'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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