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온 미래: 에스토니아 전자정부

공공분야 블록체인 현장 르포_#6: 물리적 영토 넘어서는 에스토니아의 파괴적 실험

등록 : 2018년 11월 19일 07:00 | 수정 : 2018년 11월 19일 02:02

에스토니아가 전자정부의 최첨단을 달리는 나라라는 사실을 안 것은 책 <블록체인 거번먼트>을 쓰기 위한 조사를 하면서부터다. 블록체인과 관련해 에스토니아가 계속 회자되는 게 신기해 관심을 두고 자료를 뒤졌다. 결과는 놀라웠다. 에스토니아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시도도 못 하는 전자신분증 제도와 전자투표 시스템을 각각 2002년과 2005년 도입했다. 2012년부터는 정부 운영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했다. 2014년에는 전자영주권(e-Residency) 프로그램을 시행해 자국민이 아닌 글로벌 시민들이 에스토니아에서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기업을 설립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4년 차에 접어든 지금 전 세계 154개국, 약 4만 명이 에스토니아 전자 영주권을 받았고, 이들 중 약 6000명이 에스토니아에 기업을 차렸다. 정부가 제도 하나로 전 세계에서 6천여개 스타트업을 끌어들인 것이다.

 

정부가 직접 ICO를?

전자영주권 제도도 놀라운데, 2017년 발표한 에스트코인(Estcoin)에서는 기가 찰 정도였다. ICO(암호화폐 공개)로 전 세계가 떠들썩하던 상황에 국가가 ICO를 할 생각을 하다니… 에스트코인의 ICO는 당장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유럽은행(ECB)의 강력한 반대로 사실상 중단됐다. 하지만 국가가 이와 같은 시도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며 ‘에스토니아는 국가 스스로 국경을 넘어서는 탈국가 모델을 추구하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은 인터넷의 등장 그리고 블록체인 기술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새로운 환경에서 소규모 국가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판단한 것일까? 나는 ‘아마도 그럴지 모르겠다’고 미루어 짐작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설마’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정도의 시대 진단이나 전략 수립은 글로벌 사업을 꿈꾸는 명민한 스타트업 정도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토라는 물리적 공간 위에서 활동하는 국가가 스스로 영토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근대 국가가 취해 온 전략과 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설마 국가가 이런 전략을? 적어도 에스토니아를 방문하기 전까지 에스토니아는 필자에게 미스터리와 같은 나라였다.

지난 7월 2일 드디어 에스토니아를 방문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둣 했다. 가장 먼저 에스토니아 전자정부 전시관을 찾았다. 애나 피페랄(Anna Piperal) 담당자가 실제 작동하는 서비스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행정 시스템을 어느 수준까지 자동화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토니아 전자정부 쇼룸의 프리젠테이션의 한 장면. ‘국경을 넘어 확장하는 국가(country that extends beyond its borders)’ 전략을 명확하게 표방하고 있다. 사진=전명산

결혼, 이혼, 부동산 거래 외 모든 행정을 온라인으로

애나 피페랄은 우리에게 에스토니아의 전자정부 서비스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e-ID로 접속해 개인 페이지를 열었다. 애나의 모든 개인정보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졌다. 주소, 부동산 관련 내역, 차량 번호, 의료기록, 건강보험 기록 등과 더불어 심지어 반려동물 정보까지 있었다. 이렇게 한곳에 모인 개인 정보는 X-road라는 디지털망에 연결된 정부 서비스와 민간 서비스와 연동돼 행정 서비스 자동화가 가능하다.

운전 면허증 갱신을 예로 들어 보자. 갱신 시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메일을 받으면, 메일에 적힌 링크를 클릭해 운전면허 갱신 웹사이트에 들어간다. 거기서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운전면허 갱신 작업이 끝난다. 5분이면 충분하다. 연말정산 및 세금 납부 시에도 정부 시스템에 로그인해 은행사, 카드사, 보험사 등이 가진 개인정보 가운데 국세청에 제공할 정보에만 체크하면 끝이다. 나머지는 시스템이 알아서 처리한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은 경우에도 종이 처방전을 약국에 직접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 약사가 처방전을 온라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진료 기록도 모두 온라인에 저장돼 있다.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힘들게 이전 진료기록 사본을 받아서 들고 갈 필요도 없다. 투표도 온라인으로 가능하다. 2017년 있었던 선거에서 온라인으로 투표에 참여한 비율은 31.7%였다. 또한 에스토니아 금융거래의 99%, 세금 신고의 95%가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모든 행정 자동화 과정에 에스토니아의 전자신분증 e-ID가 사용된다. 에스토니아 국민들은 e-ID를 통해 정부 및 민간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고, 약 2,600가지의 행정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다. e-ID만 있으면 운전면허증도, 자동차 보험증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모든 개인정보가 e-ID에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는 결혼과 이혼, 부동산 거래를 제외한 모든 행정 업무를 온라인화했다. 결혼과 이혼, 부동산 거래는 온라인화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세 가지는 직접 대면해서 처리해야 할 업무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하룻밤 인연에 혼인 신고를 한다든지 부부싸움 후 홧김에 이혼하는 일 등을 막기 위해서라고.

에스토니아는 2012년부터 정부 행정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 왔다. 에스토니아는 기술이 가진 성능의 한계, 구현 가능한 범위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아주 효율적인 방식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실제 정부 행정 서비스에 사용한 지 올해로 7년째다.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블록체인 기술을 운영하는데 있어, 이 정도의 경험을 가진 나라가 없기 때문에 에스토니아의 블록체인 기술은 두바이, 싱가포르, 미국 등에 수출되고 있다. (에스토니아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다음 글에 소개할 예정이다.)

한국도 전자정부라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필자가 본 에스토니아는 한국이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만약 한국이 전자 정부 전략과 실행 계획에 대한 합의를 끝내고, 지금 당장 전력을 다해 구축에 들어간다고 해도 에스토니아 수준을 따라가려면 최소 3년에서 5년은 걸릴 것 같다. 그들은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 전략을 세우고 20년 넘게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전자정부 발전의 열 단계

그들의 상황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명쾌했다. 최신의 정보기술에 기반해 있었으며, 미래를 대비한 전략도 아주 분명했다. 특히 전자영주권 사업을 맡은 카스파르 코리우스(Kaspar Korjus)의 발표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미 필자는 전자영주권과 에스트코인 사업 때문에 그에 대해 한 차례 검색한 터라 얼굴은 익숙했지만, 그가 서른이 채 안 된 앳된 청년일 줄은 생각을 못 했다. 그는 스스로 “정부 내에서 스타트업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에스토니아의 전자정부 전략을 소개하면서, 그는 “영토와 같은 물리적 조건은 앞으로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에서 온 기자단을 맞는 카스파르 코리유스. 그가 담당하고 있는 e-Residency 부서가 있는 사무실은 관료의 냄새는커녕, 스타트업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사진=전명산

 

코리유스는 전자정부를 10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맨 첫 단계는 ‘가짜 디지털(Faking digital)’ 단계다. 종이 문서를 보내기 위해 스캔 등의 방법으로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이다. 코리유스에 따르면 대부분 국가의 정부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두 번째 단계는 디지털 전환(Swiching to digital)으로, 종이 없이 디지털로 정보를 처리하는 단계다. 예를 들면 민원24 사이트에 접속해서 디지털 서명(한국의 경우 공인인증서)을 하고 주민등록 등본을 내려받는 것이 가능한 단계이다. 코리유스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해 약 10여 개 국가가 이 단계에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운영 효율성(Operating efficient)를 달성하는 단계다. 각각의 서비스를 연결해 통합 전자정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단계가 되면 위에서 예로 들었던 운전면허증 갱신 프로세스 간소화, 자동화된 연말 정산 등이 가능해진다. 코리유스에 따르면 아직 3단계를 넘어선 국가는 에스토니아를 제외하고는 없다.

네 번째 단계는 국경을 넘는(Becoming borderless) 단계이다. 에스토니아가 이미 실행하고 있는 전자영주권이 바로 이 단계를 의미한다.

다섯째 단계는 클라우드로 이동(Moving to cloud)하는 것이다. 코리유스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는 지금 5단계를 지나는 중이다. 현재 각 국가의 디지털 정보는 대부분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데이터 센터에 존재하는데, 에스토니아는 에스토니아의 행정 데이터를 과감하게 해외 클라우드 서비스에 백업해 놓았다.

에스토니아가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배경이 있다. 2007년 소련으로 추정되는 세력으로부터 국가 전산망이 공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에스토니아는 데이터를 국내에만 보관하는 것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국 내의 데이터 센터가 공격을 받거나 재난으로 멈춰도 해외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해 서비스를 지속해서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국가가 이미 영토의 경계를 벗어나겠다는 전략을 실행하는 마당에 굳이 데이터 보관 장소를 에스토니아 영토 내로 국한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도 들어 있다.

전자정부의 10단계를 설명하고 있는 코르유스. 사진=전명산

 

여섯 번째 단계는 정부 서비스를 앱스토어처럼 제공(Building app store)함으로써 개인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앱스토어는 에스토니아 시민뿐 아니라 전 세계 누구든지 접속해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험 서비스에 가입한 한국인이 한국에서 사고가 나서 보험금을 청구하면 에스토니아 정부가 한국 병원에 보험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얼핏 실없는 상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그들은 e-Residency 프로그램을 통해 글로벌로 기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이다. 보험서비스라고 안될 이유가 없다.

일곱 번째 단계는 보이지 않는 정부(Becoming invisible)를 구축이다. 현재의 행정 서비스는 연금을 받을 때가 되면 개인이 찾아가서 신청해야 한다. 그런데 이 단계에 이르면 개인이 별도로 신청하지 않아도 행정시스템이 자동으로 연금 지급 대상에 등록하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여덟 번째, 토큰 이코노미(Tokenising ecosystem)로의 진입, 아홉 번째는 AI 기반의 정부 시스템 구축(Empowering AI), 열 번째 궁극적으로 물리적인 국토와 국민에서 벗어나서 통합 사회(Merging societies)로 이르는 단계다.

 

에스토니아는 이미 5단계, 한국은?

이와 같은 단계 구분에 대해서는 약간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논란이 분분할 테니 각 단계에 대한 개별적인 논평은 생략한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에스토니아는 이미 5단계에 들어서 있고, 이후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과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 시스템을 최대한 매끈하게(seamless) 만들어 거의 행정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즉 행정 시스템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일상에 자연스럽게 행정 시스템이 녹아들게 만들고, 여기에 최근의 가장 핫한 주제 중 하나인 토큰 이코노미와 AI를 결합하겠다는 구상이다. 거의 전자정부의 완결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학자들이 20년 후 세상을 그릴 때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그림인데, 에스토니아는 이미 그 정부 서비스를 앱스토어처럼 제공하기 직전 단계까지 도달해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주어진 인터뷰 시간이 워낙 촉박해 궁극적 목표인 10단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에스토니아는 궁극적으로 전세계 시민을 상대로 정부 서비스를 제공하는 또 다른 국가, 즉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글로벌 정부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들이 제공하는 정부 서비스가 기존의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보다 훨씬 질이 좋다면, 이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필자는 저서 <블록체인 거번먼트>에서 블록체인 시대에 각국의 정부들이 초국가 시대를 맞아 정부 시스템 자체를 가지고 글로벌로 경쟁하는 시점이 올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이 예측이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당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이 주장을 뒷받침 할 현실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에스토니아 방문을 통해 필자는 필자의 예측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벌써 그런 행보를 시작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왔다.

아마 많은 독자에게 이번 글은 ‘에이 설마?’, ‘너무 나간 거 아니야?’ 하는 미심쩍은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정부와 너무도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를 보라니까!”

 


전명산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을 중퇴했다. 블로그 기반 미디어인 미디어몹의 기획팀장, SK 커뮤니케이션즈 R&D 연구소 팀장, 스타트업 대표 등 20년간 IT산업 영역에서 일을 했다. 현재는 한국 첫 블록체인 프로젝트 BOScoin의 CSO로 재직 중이다. 2012년에는 원시사회부터 21세기까지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분석한 ‘국가에서 마을로’를 출판했다. 2017년에는 블록체인 기술의 사회적 의미를 분석한 ‘블록체인 거번먼트’ 한글본을, 2018년에 이 책의 영문본인 <Blockchain Government>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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