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미신’ 벗어나려면 백서 속 이 문장을 보라

[비트코인 백서 10주년 릴레이 기고_#15] 리처드 젠달 브라운 R3 CTO

등록 : 2018년 11월 13일 07:00 | 수정 : 2018년 11월 12일 23:26

비트코인 백서 10주년 릴레이 기고, 이제 해외 필자로 이어갑니다. 미국 <코인데스크>는 비트코인 백서 출시 10주년을 맞아 “비트코인 10년: 사토시 백서(Bitcoin at 10: The Satoshi White Paper)” 라는 제목으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업계의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을 전망하는 다양한 인사들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코인데스크코리아>는 이 가운데 흥미로운 글을 엄선해 번역, 소개합니다. 이 글을 쓴 리처드 젠달 브라운(Richard Gendal Brown)은 R3의 최고기술이사(CTO)입니다.

 

영화 ‘박수건달’ 중에서. 사진=한겨레 자료사진

 

인류학에서 “카고 컬트(Cargo Cult)”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화물 신앙 혹은 화물을 믿는 미신 정도가 되는데, 19세기 후반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에서 처음 발견된 이 현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멜라네시아 사람들이 물자를 투하하는 군용 비행기가 돌아오도록 하려고 가짜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어놓고 항공 관제사를 흉내 냈던 일례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개념이다. 즉, 카고 컬트란 어떤 현상이 왜 존재하고 일어나는지 그 근원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상황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일컫는다.

비트코인 탄생 10주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블록체인 산업만큼 카고 컬트가 팽배한 분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카고 컬트를 만들어 냈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시를 한 번 살펴보자. 대부분 초창기 비즈니스 블록체인 플랫폼은 네트워크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모든 데이터를 브로드캐스트했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비즈니스는 이런 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계약은 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비트코인이 네트워크 전체에 데이터 거래 사실을 브로드캐스트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플랫폼들이 이 방식을 “카고 컬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비트코인에는 적절한 방식이었을지 몰라도 비즈니스에 도입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후 설계를 변경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을지 스스로 냉정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많은 비즈니스 블록체인 플랫폼이 이더리움 가상머신(EVM, Ethereum Virtual Machine) 플랫폼상에서 운영되는데, 이 플랫폼에서는 솔리디티(Solidity)라는 프로그램 언어를 써야 한다. 이 언어가 기능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지 이더리움이 이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EVM이 놀라운 성과를 거뒀음에도 임시방편이었다는 데 있다. 이더리움 커뮤니티는 조만간 EVM을 폐지할 계획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따라서 카고 컬팅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EVM을 채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고 컬팅에는 대가가 따른다. 새로운 언어를 학습하는 데 비용이 들뿐더러 기업들이 이미 채택한 기술을 교체하려면 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한 번 EVM 기반 비즈니스 블록체인이 자리를 잡으면, EVM을 발명한 플랫폼이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가고 난 뒤에도 기업들은 계속 EVM을 기반으로 블록체인을 이용하게 될 수도 있다.

한 가지의 특정 문제에 대해 한 가지의 특정 솔루션을 맹목적으로 채택하는 일은 기업 블록체인 혁명의 핵심 가치인 블록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무런 근거 없이 “거래를 순서대로 줄 세운 뒤 검증, 확인하고 이를 블록에 기록”하기로 한 것이 아니다. 시간의 방향이 정해진 물리적인 현실을 고려했을 때 암호화폐 경제에서 익명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위한 시스템을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는 설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서대로 거래를 늘어놓는 방식을 채택했다. 만약 사토시가 실시간으로 거래를 검증하는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플랫폼이 비트코인과 똑같은 조건에 놓인 것이 아니라면, 1960년대식 배치 프레임을 따르는 컴퓨터와 똑같이 작동하는 솔루션을 채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범 예시

나는 오랫동안 기업용 블록체인은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해체, 통합될 것이며 “심판의 날”이 머지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비트코인 탄생 10주년을 맞는 올해, 사토시가 어떻게 카고 컬팅의 우를 범하지 않을 참신한 방식을 설계했는지 되짚어보며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아래는 비트코인 프로젝트의 탄생을 선언하는 이메일의 첫 번째 줄이다.

“나는 제삼자가 신뢰를 보증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P2P 전자 현금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이 단순한 문장으로 비트코인의 출현을 알렸다.

19개의 영어 단어(I’ve been working on a new electronic cash system that’s fully peer-to-peer, with no trusted third party.)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정밀 사양과도 같다. 과거의 아이디어를 단순히 복제하는 카고 컬트가 아니라 특정 요건을 제시해 완전히 새로운 설계를 한 것이다.

이 문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 완전한 P2P라는 말은 중앙 컴퓨터가 없다는 뜻이다.
  • 제삼자가 신뢰를 보증할 필요가 없는 시스템이라는 말은 전자 현금이 플랫폼에 내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발행자를 신뢰하지 않고서는 거래할 수 없다.

이것을 보면 왜 노드를 직접 운영하는 네트워크 참여자에게 중점을 두는지도 알 수 있다. 소프트웨어로 플랫폼을 운영하고 관리할 수 없으면 신뢰를 담보하는 제삼의 기관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삼자가 신뢰를 보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거래를 검증하는 채굴자들의 신원을 강제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니, 자연히 믿을 만한 이가 거래를 검증했다고 공인해 줄 제삼자, 즉 외부 수탁 기관이 없어도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데 쓰는 신원을 사용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1인 1표”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다른 방식으로 실제 세계와 연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업증명이라는 비트코인 고유의 합의 알고리듬을 적용할 수 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래를 검증하고 나서 거래 사실을 기록하고 이 사실을 네트워크에 알리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작업의 결과는 시간 순서대로 블록에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비트코인의 전체 구조가 바로 이 19단어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 문장이 뜻하는 뼈대에 살만 붙여 다듬고 나면 비트코인의 전체 구조가 완성된다.

 

위험과 선택

요컨대 비트코인은 그동안 거래 과정에서 우리가 감내해 온 문제를 아주 매끄럽게 처리해주는 해결책인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트코인이 완전무결한 것은 절대 아니다. 또 비트코인이 풀지 못하는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 환경, 문화에 관한 문제 등 마찬가지로 아주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토시 나카모토가 이룬 업적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10년이 지난 지금 블록체인 기술이 확산되는 속도와 규모를 보면 나카모토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모든 기업 블록체인 플랫폼은 특정 사양과 철저한 공학 프로세스에 맞춰 엄밀하게 개발되지 않고 있다. 몇몇 경우 전혀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을 복제한 카고 컬트에 불과하다.

기업용 블록체인을 제대로 만들어내려면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오픈소스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아 필자가 속한 팀에서 개발, 지원하는 블록체인 플랫폼 코다(Corda)의 사례를 살펴보자. 마케팅하려는 것이 아니다. 코다가 훌륭하게 풀어내는 문제도 있지만, 좀처럼 풀지 못하는 문제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둔다.

코다는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솔루션이다. 암호화된 체인에 거래를 기록하고, 비잔틴 오류를 허용하는 합의 방식을 택하며, 대규모로 거래를 처리하는 등 다른 블록체인 플랫폼과 코다 사이에는 공통점도 많지만, 반대로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도 얼마든지 있다.

코다 커뮤니티는 특이한 설계 탓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비판은 맥을 잘못 짚고 있다. 코다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달라서 플랫폼이 설계된 방식이 다른 것일 뿐 그로 인해 기능이 다른 것은 결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다의 목표는 개인과 기업들이 법적 확신과 결제의 확실성, 철저한 프라이버시, 그리고 “당신이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직접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데 있다. 코다는 이 목표에 따라 다르게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신분 증명 레이어가 있고, 거래 기록은 당사자를 비롯해 필요한 이들에게만 전송되며, 거래가 한 번에 하나씩 실시간으로 확인되는 등의 특징이 있다.

문제를 명확하게 식별하고 좋은 해결책을 설계한 플랫폼은 매우 튼튼하다. 코다 관계자들을 모은 콘퍼런스 코다콘(CordaCon)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2019년을 향해가는 현재, 코다는 목표한 대로 개발과 서비스 운용을 달성하고 많은 기업이 코다를 채택하려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사토시가 백서에서 압축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준 덕분이다.

번역: 뉴스페퍼민트

 

[비트코인 백서 10주년 릴레이 기고]

#1_김진화 코빗 공동창업자: 사토시 페이퍼 10년, 그리고 ‘래디컬 마켓’

#2_김재윤 디사이퍼 회장: 당신의 블록체인은 ‘진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가

#3_정우현 아톰릭스컨설팅 대표: 이처럼 이과적 소양과 문과적 감성 모두 요구하는 게 또 있을까

#4_문영훈 논스 대표: 미래의 혁명가들이여, 논스로 오라!

#5_김종승 SKT 블록체인사업개발Unit Token X Hub TF장: 화폐 르네상스,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6_이송이 37coins 창업자: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세계평화’의 꿈은 현재진행형

#7_어준선 코인플러그 대표: 사토시, 비탈릭, 그리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자세

#8_이준행 고팍스 대표: 기회는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투명한 자본조달 구조 바꿔보자

#9_김휘상 해시드 CIO: 블록체인이 우리의 노동과 데이터 주권을 뒤바꿀 것이다

#10_찰리 슈렘 비트인스턴트 창업자: 베네수엘라, 터키 경제위기를 ‘남의 일’로 여기는 당신께

#11_아담 크렐렌스타인 심비온트 공동창업자: 사토시의 비전은 암호화폐보다 분산원장 기술에 녹아있다

#12_브루스 펜턴 애틀란틱 파이낸셜 CEO: 비트코인 백서는 헌법이다

#13_데이비드 슈와르츠 리플 CTO: 포드자동차 모델T 110주년, 비트코인 백서 10주년

#14_샘슨 모우 블록스트림 CSO: 비트코인 백서는 ‘성경’이 아니다

This story originally appeared on CoinDesk, the global leader in blockchain news and publisher of the Bitcoin Price Index. view B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