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는 ‘암호화폐 겨울’을 모른다

등록 : 2019년 3월 4일 07:20 | 수정 : 2019년 3월 4일 00:31

암호화폐가 널리 쓰이는 대표적인 나라를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베네수엘라를 떠올린다. 정작 베네수엘라보다 아르헨티나가 훨씬 더 암호화폐 친화적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은행이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끊기 일쑤고, 지난해 인플레이션이 (베네수엘라보다는 훨씬 낮지만) 무려 47%를 기록한 아르헨티나에서는 비트코인을 쓰는 사람이 자연히 매우 많다.

There’s No Crypto Winter in Argentina, Where Startups Ramp Up to Meet Demand

이미지=Shutterstock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절대 믿지 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아마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블록체인 스타트업 민주주의지구재단(Democracy Earth Foundation)의 창립자이자 아르헨티나의 암호화폐 스타트업 투자자인 산티아고 시리의 말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P2P 거래소 로컬비트코인스(LocalBitcoins)의 주간 사용량은 지난해 12월 940만 페소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7년에 암호화폐 시장이 상한가를 달리던 때 주간 최대 거래액이 570만 페소였던 것을 고려하면, 암호화폐 시장이 저조한 상황에서도 사용량이 빠르게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요즘은 주간 거래액 570만 페소 정도로는 아르헨티나의 P2P 시장에서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 됐다.

아르헨티나 회사들이 들쭉날쭉한 암호화폐 가격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수요와 관심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베네수엘라 이민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꾸준히 유입되면서 송금 서비스를 비롯한 암호화폐 금융 수요가 늘어났다.

“암호화폐 부문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암호화폐 기술을 사용하고 있으며, 정부보다는 암호화폐를 신뢰한다.”

시리는 말했다.

암호화폐 가격은 내렸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비트코인 관련 상품,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비트코인 거래소 비텍스(Bitex)의 CMO 마누엘 보드로아는 2019년에 아르헨티나 은행과 자산 거래소의 비트코인 관련 서비스 수요가 늘었다고 말했다.

비텍스는 3월부터 비트코인 수탁 업무를 시작해 아르헨티나 전역의 기업 고객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코인데스크에 밝혔다.

“기업 고객들은 국경을 넘는 결제와 송금 서비스에 관심이 있다. 비텍스가 이를 제공할 수 있다.”

비텍스는 최근 파라과이 정부가 아르헨티나에서 살충제와 농산물을 구매한 뒤 비트코인으로 대금을 결제하도록 중개했다. 보드로아는 이미 비텍스의 일일 거래량 50만 달러 가운데 250여 개에 달하는 기업 고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다며, 앞으로 서비스를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텍스는 이미 파라과이, 칠레, 우루과이에 진출했다.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 경제에서 독특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브라질은 국토가 너무 넓어서 스타트업들이 국내 시장에만 주력하는 경우가 많고, 멕시코에는 능력 있는 전문가들이 주로 북쪽으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간다고 시리는 설명했다.

반면 남미 대륙에서도 남쪽에 치우쳐 있는 비트파타고니아(Bitpatagonia)의 공동창립자 월터 살라마는 지난달 초 미국 마이애미에서 채굴자 1천 명을 영입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라티노(Latino)들은 주저 없이 아르헨티나를 암호화폐 산업의 허브로 꼽고 있다.

 

라이트닝에서 배우다

아르헨티나를 주목하는 이들 가운데는 개인 자격으로 투자하거나 암호화폐를 이용하는 참여자들이 많다. 자연히 비트코인의 확장성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많은 관심을 받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비트코인 지갑 스타트업 뮨(Muun)은 iOS 앱을 출시한 뒤 3월에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이용한 결제 솔루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뮨의 창립자 다리오 스나이더마니스는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주요 전략을 짜고 있다. 올해는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탑재한 제품을 출시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뮨의 직원 열 명 가운데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직원만 네 명이다. 나머지 직원들도 확장성 솔루션과 관련한 업무를 진행 중이다. 뮨의 COO 플로렌시아 라베나는 이미 1천여 건의 다운로드가 진행된 안드로이드 앱을 통해 사용자들이 실제로 암호화폐 거래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지난 겨울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빈민가로 꼽히는 바리오 31(Barrio 31)에서 몇 주간 시장 조사를 진행했다. 물건을 실제로 파는 상인들이 집중 공략 대상이었다.

“이런 실험에서는 상인들이 핵심이다.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쓰게 하도록 하려면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하는 파트너는 상인들이다.”

라베나는 바리오 31에서 상인들이 수탁 서비스나 결제 회사의 중개 없이 비트코인 결제를 취급하게 하려면 상품의 가격을 올려 상인들이 좀 더 이윤을 남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격 변동성과 유동성은 상인들이 늘 부담스러워하는 만큼 이 부분에서 고민을 덜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바리오 31에 사는 주민 대부분은 은행 계좌가 없으므로 비트코인은 송금 수단으로서도 쓸모가 많다.

라베나는 “사람들이 새로운 비트코인 솔루션에 관심이 얼마나 많은지 보고 놀랐다”라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비트코인 지갑 스타트업 뮨의 직원들. 사진=뮨 제공

투자의 국경을 허물다

암호화폐 시장이 부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도 아르헨티나 스타트업은 오히려 꾸준히 성장해 온 이유가 또 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공증 스타트업 시그나투라(Signatura)는 2015년 창립 이후 벤처 캐피털로부터 투자받은 45만 달러로 사업을 운영해오고 있다. 시그나투라의 월간 사용자는 현재 3천여 명이고, 그 가운데 5%는 비트코인으로 결제한다. CEO 곤잘로 블루손은 남미 전역으로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40만 달러 정도의 투자를 더 유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트코인으로 투자한 해외 투자자들도 있다. 그밖에 지역의 벤처캐피털도 찾아보고 있다.”

닷컴 붐이 일었던 1990년대 말과 2019년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원격으로 일하면서도 투자를 유치하고 자금을 모을 수 있는 디지털 인프라가 갖춰졌다는 점이다.

블록체인 스타트업 RSK 랩스와 RIF 랩스는 최근 회사를 합병해 IOV 랩스를 출범한 뒤 지난해 총 22,000여 개의 비트코인을 모금했다. IOV 랩스의 CEO 디에고 구티에레즈는 투자자의 절반 정도가 해외에 있으며, 투자 액수를 기준으로 보면 투자금 대부분을 해외 투자자들이 댔다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중재 스타트업 클레로스(Kleros)의 CEO 페데리고 아스트도 예전에는 아르헨티나처럼 은행이 부채로 파산하는 일이 잦은 국가의 기업은 실리콘밸리에서 좀처럼 투자를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요즘은 많은 아르헨티나인이 원격으로 근무하며 해외에서 직접 투자를 유치한다. 스테이블코인 스타트업 메이커다오(MakerDAO)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무실에는 프로젝트의 투자 유치 업무를 맡은 직원만 일곱 명이 넘는다. 메이커다오의 남미 사업 개발 책임자 나디아 알바레즈는 이렇게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100년 넘게 높은 인플레이션이 계속됐다. 사실상 모두가 늘 인플레이션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네수엘라보다 아르헨티나에서 해결 방안을 찾기가 더 쉬우리라 생각한다.”

알바레즈는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스테이블코인 사용자들이 자기 나라의 법정 화폐로도 쉽게 암호화폐를 거래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고자 메이커다오가 암호화폐 거래소 스타트업 리피오(Ripio) 등과 제휴를 체결했다고 말했다.

많은 기업이 기반은 작지만 사용자는 꾸준히 늘어나는 라틴아메리카의 암호화폐 스타트업에 비트코인을 투자하려고 하므로, 기존 은행 시스템의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아르헨티나의 스타트업과 협업해본 시리는 이렇게 말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혁신의 속도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다.”

번역: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