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시 페이퍼 10년, 그리고 ‘래디컬 마켓’

[비트코인 백서 10주년 릴레이 기고_#1] 김진화 코빗 공동창업자

등록 : 2018년 10월 23일 16:57

오는 10월31일이면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백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가 세상에 나온지 꼭 10년이 됩니다. 9페이지 짜리 짧은 논문이 지난 10년 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코인데스크코리아>는 비트코인 백서 공개 10주년을 기념해 한국 블록체인계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의 글을 모아 연재합니다. 첫 글은 한국 최초 암호화폐 거래소 코빗을 공동창업한 김진화 한국블록체인협회 이사가 보내온 글입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코인데스크코리아와 인터뷰를 했다. 요즘은 책 보다는 백서를 읽으며 정보를 습득한다고 했고, 블록체인 시대의 진정한 의미는 암호기술이 가져올 사회(와 조직의) 변화에 있다고 주장했다.

보스턴에 와서는 주로 책을 읽고 백서류는 거의 보지 않고 지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공유 되는 시대에 서울과 보스턴, 현장과 일상공간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막상 살던 곳과 늘상 만나던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현장을 떠나게 되니 생각의 리듬 또한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더라. 미국 사회 역시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탓인지 민주주의와 역사, 경제와 기술에 이르기까지 깊은 성찰과 진지한 고민이 뚝뚝 묻어나는 좋은 책들이 제법 많기도 했고. 서울에 있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스쳐지나갔던 책들 역시 찬찬히 들춰 보니 생각해 볼 거리를 많이 던진다.

김진화 코빗 공동창업자. 사진=김진화 제공

 

반면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부터 ICO 백서들은 동어반복과 맥락 없는 혁신으로 가득 찬, 요란하기만한 ‘빈 수레’가 되어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올해 초부터 필자는 여러 토론을 통해 ‘초당 몇 건의 처리건수’, 이른바 TPS 경쟁은 본질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해왔다(블록체인이 지향하는 효율성은 그런 단순한 속도경쟁이 아니라 전혀 다른 맥락이라고!). 성급한 상용화를 주장하는 ‘우물에서 숭늉 찾기 식’ 논의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주문과 함께.

시장의 침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말들의 가벼움,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는 철학의 빈곤… 이렇게 좌표가 흔들릴 때 가장 효과적이며 손쉬운 해법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오늘, 이 지면, 그러니까 사토시 백서의 10주년(고작 10년이라고?!)을 기리는 이 자리에서는 ‘래디컬 마켓’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수석 이코노미스트 글렌 웨일과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 에릭 포스너가 공저한 ‘Radical Markets’ 은 출간 직전인 지난 4월 비탈릭 부테린의 리뷰(https://vitalik.ca/general/2018/04/20/radical_markets.html)와 강력한 추천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미지=radicalmarkets.com 화면캡처

 

재밌는 점은 정작 책 본문 어디에도 ‘블록체인’이란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공식 웹사이트 상단에 비탈릭의 추천사(?)를 떡하니 자랑하고 있다. 굳이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라는 어휘를 쓰지 않더라도 이 책의 기본 철학이 분산시스템에 근간해서 제대로 된 경쟁시장을 만드는 것, 그리하여 비효율적인 독점을 막고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담대하고 실험적인 사유와 제안을 잔뜩 담은 이 책야말로 사토시 백서의 정치경제학적 버전인 셈이다.

 

전통적 담론을 훌쩍 넘어서는 담대한 사유와 제안

앞서 지난 인터뷰 얘기를 통해서도 밝혔듯이, 필자는 현업을 떠난 이후 블록체인이 보여준 잠재력을 사회변동 전반에 적용하는 실험적 가능성에 관심을 가져왔다. ‘중개자 없는 거래’는 어떻게 관료제와 독과점을 뛰어넘을 현실적 대안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너무나도 미약하거나 또 다른 ‘동원의 논리’로 전락한 참여민주주의는 블록체인의 참여적 컨센서스 메커니즘을 통해 정치엘리트의 독과점을 막을 집단지성의 무기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분산자율조직은 근대성 너머의 새로운 사회경제 구조의 유력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주식회사 모델 등 자본시장의 전화, 네트워크 경제의 전면화 등.

‘래디컬 마켓’은 놀라울 정도로 담대한 사유와 제안으로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필자가 암호화폐 논쟁의 과정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명백해 보이는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한편, 변화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기획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제대로 된 질문 던지기’에 매우 충실한 역작이다.

   기존의 담론들을 다루는 태도 역시 쿨하다. 전통과 권위를 지닌 담론적 질서의 이 편 또는 저 편에 줄서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개념과 담론의 근본으로 되돌아가 담론들의 한계를 비평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저자들이 보기에 전 세계가 직면해 있는 경제사회적 위기를 대하는 전통적인 좌우의 방법은 공히 글러먹었다. 시장 시스템에 대한 태도가 특히 그렇다. 우파는 시장에 대한 순진하고 교조적인 사고에 갇혀 현실을 도외시하며 경쟁시스템이라는 핵심가치가 흔들릴 정도로 독과점과 부의 편중을 조장내지는 적어도 방치해 왔다. 반대로 좌파는 경쟁시스템 자체를 경시하면서 관료주의, 관료적 엘리트주의로 일관해왔다. 서로 대립하는 듯 하지만, 시장의 본질적 기능과 역사적 구조를 훼손해왔다는 점에서는 이란성 쌍생아처럼 닮아 있다. 저자들이 보기에 좌우의 전통적 담론과 해결책 모두 기존의 위기와 새로운 변화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인류의 사고를 박스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 No longer bold reforms, they box us in.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일찌감치 통찰했고 냉전의 시대 좌우를 넘나들었던 오스카 랑게가 재차 강조했듯이, 시장은 본디부터 고도의 분산시스템이었다. “시장 프로세스는 전자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컴퓨팅 디바이스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오스카 랑게).” 좀 단순화 시켜 얘기하자면, 사회주의 실험이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이 자연발생적인 분산 컴퓨팅 시스템을 용량도 얼마 되지 않는 중앙시스템, 즉 ‘계획 경제’로 대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냉전 체제 이후 ‘역사의 종말’까지 외치며 승리를 선언했던 현실 자본주의 역시 이 분산적 시장시스템이 독과점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부추기거나 방조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위기에 처한 것이다. 따라서 시장을 근본적으로 분산시스템으로 재구조화 하는 것이 모든 변화의 시발점이어야 한다.

 

현실문제 해결 위한 다섯 가지 혁신적 제안

두 저자는 이를 위해 자본주의의 태두로 여겨지는 애덤 스미스를 토지공개념의 주창자인 헨리 조지와 연결시키고, 다시 이를 신자유주의의 본산이라 불리우는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들로, 그리고 게임이론에 착목하고 경매이론을 일반화 한 윌리엄 비크리 같은 실증적 경제학자와 연결시킨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구획을 넘나드는 경계적 사유를 통해 이들은 다섯 가지의 담대한 혁신안을 제안한다.

첫째, 부동산은 독점이다. 극단화된 지대추구행위는 시장의 효율과 역동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그렇다고 헨리 조지 식의 토지공개념을 채택한다면 투자효율성은 심각하게 저해된다. 따라서 비크리의 경매개념을 전면화해 부동산 시장을 분산화/자율화하자. Common Ownership Self-Assessed Tax (COST)를 통해 자산에 대해 부동산 소유자 스스로가 가격을 매기고, 그에 근간해 세금을 징수하자. 다만 그렇게 매긴 가격 이상으로 누가 매수 주문을 내면 바로 팔리는 항상적 경매시스템.

토지의 사적 소유를 이루는 근간은 크게 사용권과 점유권(배제권)인데,  이들이 제안하는 COST를 적용하면, 부동산 소유자가 사용권의 이득을 거둘 수 있지만 상당부분은 세금을 통해 공공화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배타적 점유권도 누릴 수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공정가치를 스스로 매기고 그에 따라 세금을 내는 한에서만 보호되는 것. 그 보다 가치를 더 높게 매기는 투자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소유권이 넘어가며 점유권이 제한되는 식인 것이다. 이를 통해 경매와 같은 시장적 긴장을 일상화 하자는 것.

둘째, 래디컬 민주주의의를 위한 새로운 투표시스템. 1인 1표 시스템의 한계로 주권자인 시민은 대상화되고 정치 엘리트들과 이익집단의 권력 독점, 양극단화된 여론쏠림으로 민의가 왜곡된다는 문제의식.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권자에게 정책참여에 사용할 수 있는 크레딧을 지급하고 이것으로 투표시 투표권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능동적 투표 시스템. 저자들은 이 같은 입체적 투표 시스템이 권력의 독점뿐만 아니라 무임승차, 편승경향 등의 부작용도 막게 될 것이라 낙관 한다.

셋째, 자본의 세계화 뿐만 아니라 노동의 세계화 또한 가능케 하는 분산적 비자정책, 이름하여 Visas between Individuals Program (VIP). 자본은 이동이 자유로워진 데 반해 노동력의 이동은 비자정책 등으로 제한됨에 따라 세계화가 자본을 소유한 계층과 노동력만 가진 계층의 간극을 극대화 시킨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현실적 문제이다. 또한 구글과 같은 회사는 해외 유수 인력을 초청해서 고용할 수 있는 비자정책을 이용해 더 큰 이익을 누리는 반면, 개인들은 이렇게 유입된 노동력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분산화된 비자 정책을 통해 노동력의 이동이 더 활성화될 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비자의 스폰서/관리자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화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다는 가설.

넷째, 대형 기관투자자들의 자본시장 독점을 막고 시장을 더 분산화하기 위한 새로운 반독점법. 현재의 반독점법은 산업자본의 독과점을 비교적 잘 막아 왔지만,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대다수 투자자들로 부터 위임된 자금을 통합 운용하는 거대 기관투자자들의 자본시장을 통한 독점이라는 게 저자들의 진단. 펀드 투자가 일반화되면서 전 세계 주요 산업을 지배하는 주요 업체들의 소유구조가 대여섯개 대형운용기관에 편중돼 있다는 것.

다섯째, 데이터 생산을 노동으로 규정하기 : Data as Labor. 인공지능과 자동화, 로봇 등의 기술 이슈가 노동력의 대체 가능성과 일자리 없는 성장이라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발전단계로 인류를 이끌어 가는 상황. 분배의 관점만 강조한 기본소득이 아니라, 대형 플랫폼 업체들의 네트워크에 데이터를 공급하고 있는, 현재는 노동으로 규정되지 않는 행위를 노동으로 규정해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혁신적 제안. 저자들은 이 가설을 논증하기 위해 인공지능-기계학습 시스템에서 개인화된 데이터의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인공지능 경제의 발전단계에 따라 데이터를 노동으로 규정하고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타당한 지를 검토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위한 새로운 노동 경제학.

간략히 정리하고 보니, 하나 같이 황당한 주장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제안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매우 성실하게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니 단행본 전체 또는 관련된 논문을 읽어 보는 것이 좋겠다. 현재 한국어판이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워낙 화제가 되고 있어 곧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사토시 정신의 가장 치열한 현재 모습

그나저나 블록체인이랑은 무슨 상관이냐고?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저자들의 제안을 구체화 하기 위해선, (첫번 째 제안의 경우) 부동산의 소유관계가 각자가 산정한 가치에 따라 관리되고, 그에 따른 실시간 경매에 준하는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 현재의 등기시스템으로 이러한 역동적 데이터가 (더욱이 분산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래디컬 민주주의를 위한 입체적 투표제도 역시 블록체인에 익숙한 독자라면 다양한 컨센서스 메커니즘 실험을 떠올렸을 것이다. 개인화된 비자제도 역시 기존의 중앙집중 시스템으론 관리가 요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제언은 분산화된, 그럼으로써 더 평등하고 역동적인 시장을 근간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블록체인의 정수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사토시 백서의 10주년에 즈음해 이처럼 담대한 제언이 제도 경제학을 통해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블록체인을 통해 일확천금의 가능성만 보는 이들은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필자가 그동안 주구장창 해 온 이야기들이며 지금 이 글 역시 그들을 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그런 부류들이야 암호화폐 가격이 오르면 언제나 우호 세력이 되고 시장이 침체 되면 언제든 떠날 것이며, 오늘은 블록체인을, 내일은 인공지능을, 모레는 화성탐사를 외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신이 진지하게 블록체인과 그것이 가져올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면, 좀 더 긴 호흡으로 너른 시야를 가질 것을 감히 주문하고 싶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렇기에) 무의미한 차트를 들여다 볼 시간에, 세력들의 말장난과 바람잡이식 이벤트와 흉흉한 소문에 귀기울일 시간에, ‘래디컬 마켓’ 을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이 담고있는 사유와 제안 이야말로 사토시의 정신의 가장 치열한 현재태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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