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들 알아서 기었나…’익명성=선택사항’ 덮어놓고 상장폐지

업비트·OKEx 등 프라이버시 코인 상장폐지 배경 추적

등록 : 2019년 9월 24일 10:00 | 수정 : 2019년 9월 24일 09:00

출처=게티이미지뱅크

‘거래 당사자를 알 수 없는 코인은 거래소에서 더이상 거래될 수 없다.’

국내 거래소가 잇따라 모네로(XMR), 대시(DASH), 지캐시(ZEC) 등 이른바 ‘프라이버시 코인’을 퇴출시키고 있다. 지난 6월 나온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암호화폐 규제 권고안을 준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게 이유다. 누구든 타인의 거래 내역을 뒤져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 비트코인 등 초기 암호화폐들과 달리, 프라이버시 코인은 개인정보를 어느 정도 보호하는 기능이 포함돼있기 때문이다.

업비트는 지난 20일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모네로(XMR), 대시(DASH), 지캐시(ZEC), 헤이븐(XHV), 비트튜브(TUBE), 피벡스(PIVX) 등 6종목의 거래지원 종료를 공지했다. 앞서 지난 9일 이뤄졌던 ‘유의종목 지정’에 뒤이은 후속 조치다. 업비트는 “앞으로도 익명성 기능을 표방하는 암호화폐를 유의종목 및 거래 지원 종료 후보로 지속 상정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 코인의 거래 종료는 오는 9월 30일 오전 11시로 예정됐다.

일찌감치 프라이버시 코인을 상장 폐지시킨 거래소도 있다. 오케이이엑스코리아(OKEx Korea)는 지난 10일 모네로(XMR), 대시(DASH), 지캐시(ZEC), 호라이즌(ZEN), 슈퍼비트코인(SBTC) 등의 거래 종료를 공지하며, 오는 10월 10일 이후로는 이들 코인들의 유통을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모네로(XMR), 피벡스(PIVX), 대시(DASH), 지캐시(ZEC) 등의 거래를 지원하고 있는 빗썸과 지캐시(ZEC) 거래가 가능한 코빗 역시 지난 10일 상장 폐지 가능성을 거론했다. 이들은 당국이 규제의 일환으로 프라이버시 코인의 상장 폐지를 요구할 경우 그렇게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거래소들이 프라이버시 코인에 칼을 빼든 표면적 원인은 FATF 권고안의 ‘여행규칙'(Travel Rule)이다. 여행 규칙이란 가상자산을 취급하는 기업에게 해당 기업을 거쳐가는 모든 가상자산의 흐름을 파악하고, 필요하면 정부 당국에 제공하는 의무를 지우는 조항이다. 거래소는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암호화폐 거래의 송금인과 수취인 정보를 모두 수집해야 하는데, 프라이버시 코인들은 이 정보를 숨기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규제 당국의 입김?

프라이버시 코인을 통한 자금세탁 가능성이 거론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거래소들은 그동안 일반 투자자들에게 프라이버시 코인 거래를 열어준 채 꾸준히 수수료 수익을 올려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만큼 프라이버시 코인에 대한 거래소들의 냉랭한 태도는 다소 갑작스런 면이 있다.

국내 거래소들의 단호한 태도와 관련해, 거래소 관계자 ㄱ씨는 지난 5일 핀테크산업협회에서 비공개로 열렸던 ‘암호화폐 법제화’ 간담회를 지목했다. 간담회에는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이외에 금융정보분석원(FIU), 금융감독원 등 정부 규제당국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는 “간담회가 끝나고 명함 교환하는 자리에서 정부에서 오신 분들이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거래소가 특정 코인을 상장하는 구체적인 기준이 뭐냐, 왜 외부 자문기관 없이 내부에서 결정하느냐, 코인 상장한 뒤에 어떤 책임을 지느냐 등등의 얘기가 있었다. 모네로 같은 코인들은 정부 당국에서 거래량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는 설명도 했다. 거래소들에게 어떻게 하라는 명시적 이야기는 없었지만 사실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업비트가 프라이버시 코인들을 유의종목으로 지정했다.” – 거래소 관계자 ㄱ씨

규제당국이 명확하지 않지만 지시로 여겨지는 발언을 내놓자 거래소들이 알아서 몸을 낮춘 정황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다만, 업비트는 이를 부인하며, 프라이버시 코인 상장폐지는 5일 간담회와는 무관한 자체적인 결정이었다고 주장한다.

거래소는 프라이버시 코인도 거래 내역을 추적할 수 있다

암호화폐 업계에서는 거래소의 프라이버시 코인 상장폐지 결정에 대해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술적으로 거래 내역을 숨기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술분야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지금 상황에서 거래소가 부담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암호화폐 기업을 창업한 ㄴ씨는 “프라이버시 코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기초적인 개념만 이해한 미디어들에 의해 오해가 퍼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가령 대시(DASH)나 지캐시(ZEC)는 암호화폐를 보내는 사람이 거래 내역의 익명화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암호화폐다. 거래소가 사용자에게 이들 코인을 담을 수 있는 지갑을 제공하면서 처음부터 익명화 선택 기능(optional privacy)을 제거하면, 사용자는 거래소 지갑에서 프라이버시 기능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암호화폐 커뮤니티 논스(Nonce)의 하시은 공동창업자는 “처음에 업비트 등 국내 거래소 뉴스를 보고 왜 상장폐지를 하고 유의종목 지정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면서 “대시나 지캐시는 거래소가 처음에 지갑 설정만 고정시키면 거래내역 암호화 기능이 없는 일반 암호화폐와 똑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익명화 선택 기능 없이 모든 거래 내역이 익명화되는 모네로(XMR)의 경우에도 “거래소 차원의 관리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어떤 프라이버시 코인이든 중앙화된 거래소 지갑을 한번 거치면 익명화 효과가 상당히 반감된다는 것이다.

“모네로는 ‘스텔스 주소’를 이용해 거래내역 익명화를 한다. 만약 거래소 외부에서 거래소 지갑으로 모네로 코인을 보낸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거래소에서 해당 스텔스 주소가 고객신원확인(KYC)과 자금세탁 방지(AML) 조건에 맞는지를 확인하고 그게 완료되지 않았다면 자체 데이터베이스에 반영을 안 해주면 그만이다. 반대로 거래소에서 외부 스텔스 주소로 송금을 하는 경우에도 그 주소를 확인해보고 KYC와 AML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출금을 금지하면 된다.” – 하시은 논스 공동창업자

거래소 관계자 ㄷ씨도 이러한 지적에 대해 “대체로 정확한 내용”이라고 수긍했다. 현재 기술로도 거래소들이 프라이버시 코인 거래 지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FATF 권고안을 지키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암호화폐 거래소들이 프라이버시 코인을 플랫폼에 상장하고 거래소 지갑을 만들 때 익명화 선택 기능을 제거한다. 대시 같은 경우가 그렇게 쓰는 대표적인 프라이버시 코인이다. 다만 모네로는 외부에서 거래소 지갑으로 들어오는 거래 내역을 확인하는 부분이 어렵고, 거래 내역을 거래소 차원에서 일일이 모니터링 하는 게 거래소에 실질적으로 부담이 되는 측면이 있다.” – 거래소 관계자 ㄷ씨

프라이버시 코인의 이같은 특성에 대한 코인데스크코리아 취재가 진행되던 중 업비트의 반응에서도 온도 차이가 생겼다. 애초 업비트가 지난 9일 프라이버시 코인 6개 종목을 유의종목으로 지정하면서 들었던 이유는 FATF 권고안이 유일했다. 익명화 선택 기능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20일 거래지원 종료 공지에서는 이를 직접 거론했다.

“거래 지원 종료 대상 프로젝트 중에는 익명성 기능을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암호화폐 또한 존재하고, 이러한 암호화폐에 대해 그동안 투명한 입출금만을 지원해왔지만 외부 네트워크에서의 자금세탁 및 유입 가능성까지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거래지원 종료 결정을 내리게 됐다.” – 업비트 공지

코인베이스·바이낸스는 오히려 상장하고 있는데

국내 거래소들의 프라이버시 코인 상장폐지 움직임은 세계 주요 거래소들이 오히려 프라이버시 코인을 상장하고 있는 추세와도 방향이 상반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의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Coinbase)’는 지난 16일 자사의 전문 투자자용 플랫폼인 ‘코인베이스 프로’에 프라이버시 코인인 대시(DASH)를 상장한다고 밝혔다. 코인베이스는 이용자 수가 3천만 명이 넘는, 거래량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암호화폐 거래소 중 하나다.

거래량 기준 세계 최대의 거래소인 바이낸스(Binance)는 오는 20일부터 대출 플랫폼인 바이낸스 랜딩(Binance Lending)을 통해 모네로(XMR), 지캐시(ZEC), 대시(DASH) 등 프라이버시 코인에 대한 대출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 서비스는 사용자가 보유 중인 프라이버시 코인을 거래소에 빌려주면 이자를 제공하는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프라이버시 코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면 나오기 어려운 업태다.

반면, 지난달 영국 코인베이스(Coinbask UK)가 프라이버시 코인인 지캐시에 대한 거래 중단 조처를 내린 일도 있었다. 코인베이스는 당시 상장 폐지 결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에 앞선 지난달 초 영국 금융감독원(FCA)이 암호자산 규제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것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정식 법규 변화에 따라 이뤄진 ‘상장 폐지’는, 당국을 만난 뒤 우선 거래부터 중단시킨 한국 거래소들의 조처와는 결이 달라보인다. 암호화폐 관련 법규가 미비한 탓에 빚어진 풍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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