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 뗀 암호화폐 제도화…새해엔 무엇이 달라질까

거래소 신고제 담은 특금법 개정 눈앞 / 외국 금융기관 잇단 암호화폐 사업 진출 / 전문가들 “한국에선 당분간 어려울 것”

등록 : 2019년 12월 24일 10:00 | 수정 : 2019년 12월 24일 09:57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총회가 열렸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는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이용한 자금세탁을 막기 위한 국제 기준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회원국인 한국도 관련 법률 개정을 추진 중이다. 출처=FATF 트위터

주요 20개국(G20)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암호화폐 규제 도입과 제도화가 한창이다. 2009년 비트코인이 탄생한 이래 다양한 암호화폐 사업이 등장하고 산업이 커지면서 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에서 가장 먼저 도입하는 규제는 자금세탁방지법이다. 암호화폐는 은행을 거치지 않고 개인 간 국외 송금이 가능하다. 길게는 며칠씩 걸리고 수수료도 비싼 은행의 국외 송금보다 빠르고 싸며, 무엇보다 정부가 파악하기 힘들다.

이렇다 보니 범죄자금의 세탁이나 국외로 자산을 빼돌리려는 용도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하다. 북한, 이란 등에 대한 미국의 고강도 경제제재에도 우회로가 될 수 있다. 유엔 협약과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른 금융조치를 이행하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암호화폐 규제에 앞장선 것도 이런 이유다.

비트코인 가격은 2017년 초 약 1천달러에서 그해 연말 2만달러(2000%)까지 폭등했다. 세계적 이슈가 되자 G20 재무장관 회의는 2018년 4월 FATF에 기준 마련을 요청했고, FATF는 그해 10월 가상자산의 정의, 규제 대상 범위, 자금세탁 방지 의무 등을 담은 국제기준을 만들었다.

금융위원회는 “국제기구 차원의 가상자산 자금세탁 방지 논의는 마무리 단계이며 이미 전세계 국가에 규제 이행을 촉구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FATF 회원국 38개 나라 중 미국과 일본은 이미 자체 규제를 마련했다. 유럽연합(EU)은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부과하는 지침(AMLD5)을 2020년 1월 시행한다.

한국 암호화폐 규제는

FATF 회원국인 한국도 법령을 준비 중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최근 핀테크, 가상자산 등 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금세탁 위험 역시 크게 증가했다며 제도를 단단히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FATF 국제 기준이 담긴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 개정안은 지난 11월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했고, 현재 법제사법위원회 상정을 앞두고 있다. 선거법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논쟁으로 여야가 대치 중이지만, 쟁점법안이 아니라서 법사위와 본회의가 열리기만 한다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월 초에라도 본회의가 한번은 열릴 테니 20대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금법의 목적은 불법 자금세탁 방지다. 개정안은 규제 대상에 가상자산을 추가하고, 가상자산 사업자들에게 은행 등 금융기관에 준하는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부여한다. 주요 규제 대상은 암호화폐 거래소다. 추가로 암호화폐를 발행해 자금을 모은 블록체인 기업(ICO) 등도 규제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개정안의 핵심은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제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이들만 사업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수천만원만 있으면 누구나 암호화폐 거래소를 만들 수 있는 시기는 끝나는 것이다. 또한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금융기관처럼 고객의 신원을 확인하고, 의심거래를 파악해 금융위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해야 한다. 이런 수준의 자금세탁 방지 시스템과 조직을 갖추는 데는 최소 수억원이 필요하다.

민병두 국회 정무위원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특금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국내 블록체인 산업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무분별한 암호화폐 거래소 난립과 불투명한 운영, 그리고 블록체인 프로젝트 기업의 유사수신행위, 다단계 판매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며 “이제 블록체인 시장의 건전한 육성과 소비자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더욱 다양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특금법 개정 이후

특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블록체인 업계의 구조조정이 예상된다. 금융정보분석원은 ‘실명확인 입출금서비스’(실명가상계좌)가 없는 사업자의 신고는 거부할 수 있다. 현재까지 은행과 계약해 실명가상계좌를 받은 거래소는 빗썸, 업비트, 코빗, 코인원 4곳뿐이다. 또 다른 의무조건인 ‘정보보호 관리체계’(ISMS) 인증을 받은 곳은 이 4곳과 고팍스, 한빗코뿐이다. 수십개로 추정되는 국내 거래소 중 소수만 남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법무법인 세종의 조정희 변호사는 “시장이 합법화되겠지만 대형 거래소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될 것”이라며 “기존 법인계좌(일명 벌집계좌)로 원화를 받아온 거래소는 많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많은 사업자가 어려워지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규제가 없어 혼탁해진 시장이 정리되면서 가상자산에 대한 신뢰가 조금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천창민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경영학과)는 특금법이 개정되더라도 거래가 줄어드는 현상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은행이 거래소에 실명계좌를 안 열어주니까 기존 투자자들만 거래하고, 신규 자금이 안 들어오는 정체 상황이다. 특금법을 개정한다고 은행이 실명계좌를 열어주지는 않을 테니 거래가 활발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이 정화되는 계기 정도의 신호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 일각에선 특금법 개정을 암호화폐 거래 양성화 제도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노태석 금융위 정책전문관은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가상자산 규제법이 없는 상황에서, FATF가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금법 내에 둔 것이다. 개정안을 ‘가상자산 거래를 양성화한다’는 취지로 이해해선 안 된다. 거래 제도화는 별개의 문제”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암호화폐공개(ICO)가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조 변호사는 “암호화폐공개나 토큰세일 허용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금융위는 2017년 9월 암호화폐공개 전면 금지 방침을 발표했다. 이어 국무조정실은 2018년 1월 “과도한 가상통화 투기와 불법 행위는 강력히 대응하되, 기반기술인 블록체인의 연구개발 투자는 지원하고 육성한다”고 밝혔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때 밝힌 정부의 스탠스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의 진출

암호화폐 산업에서 기회를 본 일부 선진국은 자금세탁방지법 외 제도도 마련 중이다. 이에 맞춰 금융기관들도 암호화폐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미국 뉴욕주는 2015년 일찍이 가상통화업자에 대한 인허가제인 비트라이선스를 도입해서 규제하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모회사인 인터콘티넨털익스체인지(ICE)는 비트코인 선물거래소 백트(Bakkt)를 운영 중이다. 백트는 최근 비트코인 옵션상품을 내놓은 데 이어 내년 상반기 스타벅스와 제휴해 비트코인 등으로 결제할 수 있는 앱을 내놓을 예정이다. 2조8천억달러를 관리하는 자산운용사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도 암호화폐 수탁 사업에 진출했다.

독일은 유럽연합 지침에 따라 은행법을 개정해 금융상품 아래 ‘크륍토베르테’(Kryptowerte)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가상자산 사업자는 내년 11월 말까지 인가 신청을 해야 한다. 독특한 건 은행들이 내년부터 바로 암호화폐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은행협회는 “규제당국 감독하에서 고객 자산 보호와 리스크 관리 경험이 있어 효과적으로 자금세탁 방지를 수행할 수 있다”며 환영했다. 독일에서 두번째로 큰 슈투트가르트 증권거래소도 지난 9월 증권법의 규제를 받은 디지털 자산 거래소 운영을 시작했다.

2014년 당시 세계 최대 거래소였던 마운트곡스 해킹을 경험한 일본은 일찌감치 강도 높은 규제를 시행했다. 암호화폐 거래소는 금융청에 등록해야 하는데 진입장벽이 매우 높다. 이렇게 금융당국이 보수적인 입장이지만 암호화폐 사업을 연계하려는 금융기관의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세계 5대 금융그룹인 MUFG은행은 일본 양대 통신사인 NTT도코모, KDDI 등과 ‘증권형 토큰 리서치 컨소시엄’을 운영하고 있다. 노무라증권, 다이와증권 등 증권사 6곳도 증권형 토큰 발행을 위한 자율규제기관으로 ‘일본 증권형토큰(STO)협회’를 설립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금융법 전문가들은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 천창민 교수는 “특금법이 개정되더라도 자본시장법상 암호화폐는 금융투자상품에 속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 일본처럼 규제가 정비되더라도 은행이 리스크 높은 거래소에 진출하지 않을 것이며, 금융위가 인가해주지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금융위 관계자는 미국, 일본 등의 제도화 방향에 대해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금융위, 금융감독원 자문을 하는 홍기훈 홍익대 교수(경영학부)는 블록체인 업계가 이젠 아이티(IT)가 아닌 금융산업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금법 개정을 앞둔 상황에서 가상자산 사업자들이 금융산업 기준에 따라 자신들이 거래소인지 브로커인지 어떤 존재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규제기관도 거기에 대응할 수 있다. 미국, 독일에선 처벌을 강하게 할 수 있지만, 한국은 사후 처벌이 약하고 그 책임을 규제기관에 넘긴다. 규제기관 입장에선 계속 사고가 나니까 책임지기 겁날 수밖에 없다. 업계가 이 구조를 이해해야 타협안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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