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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불어 닥친 암호화폐를 둘러싼 투자(혹은 투기) 광풍은 다소 잦아든 것처럼 보이지만, 올해 들어 블록체인에 관한 관심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특히 블록체인에 관심을 두는 이들의 범주가 일부 개발자,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으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전자상거래업체 라쿠텐이 기존 사업 모델에 토큰 이코노미를 적용하는 리버스 ICO 계획을 밝히며 블록체인 분야에 뛰어들었고, 국내 대표 인터넷·모바일 서비스 업체인 카카오와 라인마저 블록체인 자회사를 설립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이들을 제외하면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은 미진한 대응을 보인다. 이처럼 새로운 분야가 부상할 때, 기민하게 대응하는 대기업이 드문 편이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고민해봤다.

많은 대기업은 다양한 소비자를 상대한다. 소비자의 충성도를 높이는 전략 중 하나는 소비 실적에 상응하는 보상(포인트 혹은 마일리지) 지급이다. 그렇다면 대기업에서 보상체계와 멤버십에 암호화폐를 적용하면 어떨까? 여러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기업으로선 암호화폐가 가지는 여러 특징(초 소액결제 가능, 분산 저장을 통한 보안 강화) 등을 멤버십 포인트에 접목할 수 있고, 무엇보다 블록체인 시스템을 직접 운영하는 경험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다. 가격 변동 폭이 우려된다면 가치 안정(Stable) 암호화폐의 형태로 토큰 이코노미를 설계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멤버십과 포인트 체계가 비용 투입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효율적이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대기업이 블록체인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효율이 낮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용처를 찾기도 쉽지 않은데, 그나마 용처를 찾아도 기존 방식보다 나은 점보다 안 좋은 점이 크다면 도입할 이유가 없다. 많은 단점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명 기존(Legacy) 시스템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단점을 감수할 만한 장점이 있어야 한다. 일부 시스템이나 사업 모델에서 부분적인 활용은 가능하지만, 전반적으로 활용이 어려우므로 대기업은 블록체인 도입과 활용에 아직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진짜 문제는 많은 대기업이 이런 장단점을 평가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블록체인 기술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보다는 정부와 여론의 눈치를 보며 의사결정을 한다. 국내에서는 금융감독원과 법무부 등이 앞장서서 암호화폐를 인정하지 않고 거래소 폐쇄 등을 고려한다는 규제 신호를 보냈으니, 대기업으로선 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또한, 하향식(Top Down)의 의사결정 구조로 움직이는 대기업에서 신사업은 전적으로 고위임원의 의사결정에 달려있다. 이들이 블록체인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관련 연구와 사업을 추진하기는 어렵다. 대기업들이 내부에서 움트는 혁신의 싹을 키우지 못하는 이유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카오와 라인의 경우 대기업과는 다른 의사결정과 신속한 행보를 보인다. 같은 대기업으로 분류되어도 인터넷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다른 DNA를 가지고 새로운 시장을 포착하는 것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해외 대기업들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중국에선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 기술 연구 및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기업들이 많다. 중국의 거대 이커머스 기업인 알리바바와 징동은 커머스 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육성과 기술 개발을 통해 블록체인을 다양한 사업에 적용할 계획을 하고 있다. 알리바바는 2014년부터 블록체인 기술 연구를 시작했고, 물류 분야에 우선 적용하고 있다. 징동 역시 월마트, IBM 등 미국 기업과 제휴를 통해 블록체인 물류 분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 대기업인 완샹그룹은 블록체인 연구소를 설립해 각종 암호화폐 프로젝트에 투자하면서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시티를 구축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세워둔 상태다. 일본의 라쿠텐도 이미 수년 전부터 블록체인 스타트업을 인수하고 관련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전체 사업 영역에 블록체인을 활용할 준비를 해왔다.

이들 기업이 당장 사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블록체인에 왜 적극적으로 투자했을까? 블록체인은 단순한 가상화폐 기술이 아닌 가까운 시일 내에 산업과 기업의 구조를 바꿔 놓을 수 있는 기술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실패를 감수하고서도 향후 시장과 기술 선점의 효과를 누리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하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발전하고, 성능이 개선될수록 산업 전반에 적용되는 사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으로 인해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직업과 업무들이 생겨 날것이다. 대기업이 블록체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기업의 미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일자리 창출로 국가 경제에도 이바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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