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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암호화폐 투자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지만, 위에 나열한 기술용어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투자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용어들을 모르더라도 암호화폐를 거래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거래소에서 암호화폐를 거래하던 중 문제가 발생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아무런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수로 잘못 이체한 암호화폐를 되찾기 위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블록체인 지식이 필요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잃어버린 돈을 되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서울 강남구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김아무개(35)씨는 지난 1월6일 미국의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렉스에 있는 자신의 비트코인을 국내 1위 거래소 업비트로 옮기려 했다. 유학 시절부터 지금껏 비트렉스에서 거래를 해왔지만, 이제 한국에 자리를 잡은 만큼 국내 거래소로 갈아타기로 한 것이다. 암호화폐를 다른 거래소로 이체하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비트렉스의 비트코인 지갑을 연다고 생각했지만, 그만 실수로 작년 12월에 구입한 디지바이트(DGB)라는 암호화폐의 지갑을 열었다. 김씨는 무심코 지갑에 있던 78만2022개의 디지바이트 전량을 업비트의 비트코인 지갑으로 이체했다. 당시 시세로 약 1억5000만원이었다. 디지바이트는 빠른 처리 속도를 기반으로 온라인 게임 내에서 아이템 구입 등 다양한 연계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는 암호화폐다. 이체가 이뤄지긴 했다. 하지만 김씨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디지바이트
디지익스플로러에서 확인한 김씨의 디지바이트 코인과 전송 내역

 

각각의 암호화폐는 저마다 다른 블록체인을 갖고 있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과 이더리움의 블록체인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비트코인은 비트코인 지갑으로만 이체가 되고, 이더리움은 이더리움 지갑으로만 이체된다. 김씨도 원래 디지바이트가 아니라 비트코인을 비트코인 지갑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별개의 블록체인 간에 이체가 원천적으로 막혀있다면 김씨의 실수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김씨의 이체는 실패했을 것이고, 김씨의 디지바이트는 비트렉스 지갑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 이유는 디지바이트가 비트코인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파생된 암호화폐이기 때문이다. 디지바이트뿐만 아니라 많은 알트코인들이 최초의 암호화폐 비트코인을 차용해서 만들었다. 이들 알트코인들은 비트코인과 지갑주소 양식이 유사하다. 이때문에 ‘비트코인 계열’의 알트코인의 경우 엉뚱하게 비트코인 블록체인에 거래내역이 기록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뒤늦게 실수를 알게 된 김씨는 사고 발생 이틀 뒤인 1월8일 업비트 본사를 방문해 고객서비스 담당 팀장을 만나 상담을 했다. 담당 팀장은 “오입금 문제는 시간이 걸리는 일일 뿐 기다리면 찾을 수 있다. 오입금 정정 신청서를 업비트 고객센터로 보내고 기다리면 된다”며 김씨를 안심시켰다. 한 달이 지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김씨는 업비트를 방문했지만, 담당 팀장은 이전과 똑 같은 말을 반복했다.

2월23일 업비트는 홈페이지를 통해 오입금과 관련한 공지사항을 발표했다. 업비트는 7가지 오입금 사례를 열거하며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를 밝혔다. 업비트가 밝힌 오입금 해결 가능/불가능 경우는 다음과 같았다.

1. 리플(XRP) 주소를 잘못 작성: 가능
2. 스팀-스팀달러 메모를 잘못 작성: 가능
3. 이더리움(ETH)-이더리움클래식(ETC) 간 오입금: 가능
4. ERC20 계열 토큰을 ETC로 오입금: 가능
5. 비트코인(BTC)/비트코인캐시(BCH)/비트커넥트(BCC)/비트코인골드(BTG) 오입금: 가능
6. ETC나 ETH를 본인 ERC20 지갑으로 이체: 불가능
7. ERC20을 본인 ETH 지갑으로 이체: 불가능

자신의 경우가 업비트가 밝힌 7가지 유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 김씨는 다시 담당 팀장과 상담을 했다. 팀장은 김씨의 디지바이트가 ERC20에 해당돼 오입금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

문제가 쉽게 해결될 줄만 알았던 김씨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김씨는 직접 디지바이트 재단 기술지원팀에 문의를 했다. 업비트 팀장의 설명과 달리 디지바이트가 ERC20 계열이 아니라 비트코인 기반 토큰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업비트 담당 팀장이 실수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 테니, 78만개의 디지바이트 토큰을 곧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업비트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

디지바이트, 오입금
김씨가 디지바이트 재단 측과 오입금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한 대화 중 일부.

 

김씨는 디지바이트 재단에 직접 도움을 청했다. 디지바이트 창업자이자 코어 개발자 제러드 테이트와 연락이 닿았다. 테이트는 업비트 내 김씨의 비트코인 지갑 프라이빗키를 알려주면 30분 안에 오입금한 78만개의 토큰을 복구해줄 수 있다고 했다.

블록체인에는 퍼블릭키와 프라이빗키가 있다. 퍼블릭키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된 정보로, 지갑주소를 의미한다. 프라이빗키는 주인만 알 수 있는 비밀번호와 같은 것이다. 개인 지갑이 아니라 거래소가 제공하는 지갑을 이용할 경우 거래소가 개별 투자자들의 프라이빗키를 보관한다.

김씨는 테이트가 제시한 해결방안을 업비트에 전달했다. 하지만 업비트는 김씨의 프라이빗키가 영업기밀에 포함된다는 이유로 전달을 거부했다. 업비트는 빗고(BitGo)라는 회사가 제공하는 지갑을 사용하는데, 빗고 지갑이 디지바이트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김씨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스택익스체인지(stackexchange.com)를 찾았다. 스택익스체인지는 지난 2008년 제푸 앳우드와 조엘 스폴스키가 만든 세계 최대 규모의 개발자 지식공유 사이트로, 현재 전세계 약 200만명 이상의 개발자들이 등록해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스택익스체인지에 모인 개발자들은 김씨에게 빗고가 디지바이트를 취급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기술적으로 오입금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김씨는 이 내용을 다시 두나무(업비트)의 김형년 부사장과 빗고 쪽에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비트는 지난 4월13일 빗고와 상의한 결과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최종 전달했다.

업비트는 “고객의 프라이빗키는 노출될 경우 악용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보안상 절대 외부로 반출할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김씨의 경우 오전송으로 인해 (비트코인) 블록체인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빗고에서 디지바이트를 지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하다. 추후 빗고에서 디지바이트를 지원한다면 그때 다시 한 번 복구 가능 여부에 대해 검토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업비트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오입금 문제를 겪는 수십명과 함께 네이버 카페(http://cafe.naver.com/upbitwrongtransfer)를 개설해 블록체인 공부를 하며 공동 대응을 해왔다. 그 결과 김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비트가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한지 3일 뒤인 지난 14일 오입금한 암호화폐를 복구해주겠다는 답을 받아냈다.

김씨는 이제 비트코인 블록체인 상에서 ‘미아’가 된 디지바이트 78만개를 찾기 위해 업비트 측에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는 “거래소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직접 코인을 만든 재단과 여러 개발자들을 접촉해 그동안 몰랐던 블록체인을 공부해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여전히 업비트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고 있다. 지금이라도 업비트가 더 투명하고 성의있게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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