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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실제로 누가 이득을 보게 되는 거야?”

청중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지난 1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블록체인의 사회적 영향> 콘퍼런스. 당시 이곳은 300여 명의 참가자로 꽉 들어찼고, 위의 저 한마디는 그날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평화연구소에 모인 참가자들의 면면은 이더리움 사업가부터 암호화폐에 관심이 많은 국제개발 담당자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체적인 분위기 만큼은 한결같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결과였다. 블록체인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 건지, 그 결과가 누구의 삶을 어떻게 낫게 해줄지에 관심이 쏠렸다.

난민구호단체 옥스팜(Oxfam) 태평양 지부에서 자금 및 생계 업무를 관장하는 샌드라 하트 고문은 코인데스크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환경에서 과연 블록체인이 목표한 바를 이뤄낼 수 있을지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블록체인도 앞으로는 공급 주도형이 아닌 필요한 사람이 제품과 서비스를 구상하는 수요 주도형으로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

개념증명 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거나 앞날이 창창한 토큰 판매 열기로 가득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그 대신 이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원하는 결과를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블록체인 기반 제품이나 서비스가 혜택을 가져다줄 당사자들과 해당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된 듯했다.

일례로 하트 고문은 현재 바누아투에서 진행되고 있는 블록체인 시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바누아투는 태평양의 섬나라로 전 세계에서 자연재해에 가장 취약한 곳 가운데 하나다. 이 사업은 블록체인과 연계된 신분증을 신용 거래에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올해 9월부터 내년 2월까지 시범 운영된다. 이를 통해 최근 화산 폭발로 이재민이 된 주민 가운데 최대 1,000가구가 수혜를 입게 될 전망이다.

이날 회의 참가자들은 하트 고문이 옥스팜의 인도주의적 블록체인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느꼈던 가능성과 문제에 대체로 공감하는 것 같았다. 즉,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블록체인 솔루션은 혜택을 받는 쪽과 지역 내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협력하여 주민들의 평소 습관을 관찰하고 시급한 인프라 등을 함께 보완해 나갈 때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더리움 기반 복합 스타트업 콘센시스(Consensys)의 바네사 그랠릿 전무는 현지 주민을 직접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하트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기본적인 여건 조성 없이 주민들의 행동만 변화시키겠다는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이는 기술자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고 부를 창출하는지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그 기술로 만든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듣고 보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평소 그랠릿 전무의 믿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트의 사례에서 살펴봤듯, 옥스팜은 현재 “바누아투 장애인 협회”, “바누아투 청소년 챌린지” 두 단체와 공동으로 명목화폐를 적용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하고 있다. 바누아투 주민들에게는 신용카드나 암호화폐보다 모바일 기기와 현금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트를 비롯해 이날 회의에 참석한 각 분야 전문가들은 블록체인 업계와 지지자들을 향해 블록체인 기술이라는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일종의 '블록체인을 위한 블록체인'을 만드는 데 그치지 말고, 눈을 들어 세상의 다양한 커뮤니티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실제로 쓸모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아달라고 촉구했다.

 

현실적인 문제에 주목하라


하트는 사실 콘퍼런스 가운데 나온 누군가의 주장을 자기 언어로 바꾸어 다시 편 셈이다. 그 주장이란 곧 더 많은 사람이 블록체인을 활용하고 블록체인에 관심을 가지며 지지하게 하는 데 과연 토큰이라는 것이 꼭 필요할까에 관한 회의적인 시각이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멋진 상품이나 서비스라도 처음부터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 토큰을 들이민다고 없던 관심이 절로 생기지는 않는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아무리 좋은 서비스나 제품도 문화적 맥락이나 환경에 맞추지 못했다가 쓸모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기 일쑤다. 예를 들어 수혜자나 지원을 받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골라 쓰는 데 익숙한데, 거기에 덜컥 현물 지원을 해버리면 자칫 수혜자의 존엄성과 선택권마저 앗아갈 위험이 있다.

그랠릿 전무는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두 가지로 첫째, 많은 사람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정확히 어떤 문제를 풀려고 하는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둘째, 해결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불편해하는 잠재적인 소비자이자 수혜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하지 않는 점을 꼽았다.

어떤 면에서 프로젝트 설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발팀이 거의 없다는 점은 더 심각한 문제다. 설계 과정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기술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혁신 프로젝트라 해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할 때가 많다. 실제 사용자에게 호응을 얻기도 전에 손에 잡히지 않는 허황된 꿈만 좇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변하는 부분이 있고, 더 근본적인 시스템이 변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일단 무조건 근본적인 변화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활동가가 어김없이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바로 서서히, 그러나 깊숙이 뿌리내리는 관료주의라는 복병이다.

이에 대해 그랠릿 전무가 블록체인 지지자들에게 건네는 조언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작은 것부터 한 걸음씩 내디디라는 것이다. 목표야 높고 원대하게 잡을 수 있지만, 실천에 옮길 때는 기존의 이용자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나씩 바꿔나가는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다. 이렇게 접근해야만 문화적 맥락에 맞지도 않은 서구의 관습을 억지로 이식하려는 충동을 억누르며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그랠릿은 이어 이렇게 말했다.

“당장 우리가 기존에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던 이들에게 은행의 문턱을 낮춰 은행을 이용하도록 해주는 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도 사실 확실하지 않다. 기껏 은행을 이용하라고 했는데 정작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은행 시스템에서 배제되면 그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 우리의 목표는 신용을 평가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그 토대 위에 사람들이 필요할 때 자금을 빌릴 수 있는 기관을 세우는 것이다. 기존 은행을 억지로 들이미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랠릿은 예를 들어 송금 절차를 간소화하고 수수료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낸 스타트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더 나은 송금 솔루션이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블록체인을 통해 더 간편하고 수수료도 덜 내며 송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조차 잘 없다는 사실이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비용은 언제든지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들 지역 주민이 실리콘밸리나 런던에 사는 사람 만큼 기술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산다고 가정해서도 물론 안 될 것이다.

하트 고문은 바누아투 일부 지역의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없을 때, 블록체인 밖에서 일을 처리해야 할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인도주의적 지원은 원래 철저히 받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지원품을 개발하거나 구상할 때도 기존의 제품을 어떻게 바꾸고 변화를 줘야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돼 쓰일 수 있을지부터 고민하는 게 원칙이다.”

 

사용자가 아닌 파트너


여러 자원에 대한 접근 자체를 탈중앙화하는 것이 아주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라이트메시(RightMesh) 같은 스타트업이 대표적인데, 라이트메시는 지난주 끝난 토큰 판매를 통해 3천만 달러를 모았으며, 이 돈과 발행한 토큰을 당장 필요한 곳에 쓸 계획이다.

라이트메시의 블록체인 제품 매니저 브리아나 맥네일은 조만간 도입될 메시 네트워크 플랫폼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하기 위해 이미 방글라데시에서 약 100여 명을 채용했다고 밝혔다. 라이트메시 이용자들은 무선 인터넷이 없는 곳에서도 일반 모바일 기기로 메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게 된다.

맥네일의 설명은 앞서 하트 고문이 지적한 인프라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메시 네트워크는 모든 종류의 오픈소스 환경에서 이용 가능하다. 우리가 메시 네트워크가 어떻게 활용될지 그 모든 사례를 전부 다 알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개발자에게 각종 툴을 제공한 뒤 이들이 알아서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 지역에서는 네트워크 연결이 취약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수 없다.”

이것은 그랠릿이 올해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오픈소스 개발자 커뮤니티를 다양화하는 것이다.

“사업 영역을 전 세계로 확대하고 솔루션 개발에 지역 인재를 활용함으로써 실질적인 글로벌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더는 미국만의, 혹은 서구만의 시스템이 아니어야 한다.”

난민 커뮤니티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난민 지원 기술개발 업체 테크퓨지(Techfugee)의 CEO 조세핀 구베 역시 참가자를 향해 비슷한 호소를 전했다.

“부탁인데 제발 나한테 와서 앱을 만들어달라고 하지 말아달라. 직접 만들면 된다. 직접 만들 수 있고, 그래야 더 잘 만든다.”

대신 구베는 테크퓨지가 어려움에 처한 난민들이 스스로 필요한 툴을 만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회를 제공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녀는 난민을 위한 블록체인 솔루션을 만들어주겠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UN 인권이사회(UNHRC)에 따르면 전 세계 난민 인구는 대략 6,560만 명에 달한다.

이처럼 커뮤니티가 직접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뒤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때는 기업이나 여러 단체를 참여시켜 긍정적인 영향력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고 그랠릿은 말했다.

“성공의 열쇠는 협업이다. 정부와 자선단체, 비정부기구, 기업, 기술자 등 각종 개인과 단체가 함께, 같이 노력하지 않는 한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국제개발 전문가에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남아있다. 데이터베이스 대신 굳이 왜 블록체인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점이다.

UN 세계식량계획의 혁신 및 변화관리처장 로버트 옵은 현재 요르단에 있는 시리아 난민 1만 명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이더리움 시범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UN 세계식량계획은 시범 프로그램을 난민 50만 명에게 확대하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으며, 이들의 신원을 마찬가지로 이더리움을 통해 확보, 관리하는 기술을 검토하고 있다.

만약 지금이 프로젝트의 막바지 단계라면 우리는 늘 그랬듯이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막 걸음을 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에 좋은 것을 찾아 많은 실험을 해봐야 한다.

번역: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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