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암호 시스템 개발자 필 짐머만이 5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분산경제포럼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코인데스크코리아

 

가장 널리 쓰이는 이메일 보안 시스템 PGP(Pretty Good Privacy)를 개발해 암호화 기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필 짐머만(65)은 요즘 걱정이 크다. 기술 발전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추구해온 그의 삶의 궤적과 달리, 기술이 비민주적 권력의 출현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짐머만은 2회 분산경제포럼(디코노미 2019) 이튿날인 5일 오전 기조강연에서, 안면인식, 딥러닝, 빅데이터 등 기술로 감시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중국의 사례를 들며 “걱정이 돼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짐머만은 “중국은 역량을 집중해서 감시 기술을 개발하는 중이다. 수백만대의 카메라가 설치됐고 안면 인식 기술을 접목시켰다”고 말했다. 누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강연을 하는지, 누구와 식사하는지 등을 지켜보면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받는지, 무엇을 사는지 등 정보와 데이터를 취합 및 융합해 감시하는 기술을 갖췄다는 것이다.

짐머만은 중국이 이 같은 기술로 정치적인 반대 여론을 통제하면서 공산당의 영구 집권을 도모하는 한편, 국외 수출도 추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중국에선 이미 너무나 완벽한 감시 감독 체계가 마련돼 반대 여론이 자리를 잡을 수 없다”며 “기술을 상품화하는데 능한 나라인 만큼, 국내에서 검출된 오류를 제거해 완벽해지면 수출에도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짐머만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라 해도, ‘가치관이 다른’ 정치인들의 결정으로 이런 시스템을 중국에서 도입하면 감시가 만연한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짐머만은 감시 기술의 성장은 각 사회의 여론 양극화를 부추기는 등 더욱 심각한 위험으로 이어진다고 짚었다. 그는 “힘과 권력의 집중화를 위해 감시 기술이 성장하면 민주주의의 근간이 붕괴되면서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진공 상태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파시즘의 부상”이라고 했다. 그는 “인구는 18개월, 24개월 마다 2배씩 늘어날 수 없다. 그러나 전산 능력은 가능하다. 몇배씩 향상된다”며 “감시 기술도 계속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술에 의한 감시 사회를 비켜갈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암호 전문가인 짐머만은 “당신의 얼굴을 암호화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며 비관했다. 그가 개발한 PGP 덕분에 이메일은 암호화돼서 당사자들 사이에만 공개됐고, 많은 이들이 여러 형태의 감시를 벗어났다. 그러나 카메라로 얼굴을 촬영하며 움직임을 직접 들여다보는 새로운 감시 사회에선 암호화를 통한 ‘감시 탈출’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짐머만은 우선 문제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술 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은 만큼 전사회가 문제를 인식하도록 한 뒤, 전방위적으로 치열한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입법 조처를 통해 프라이버시 수단을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때 경찰국가로 불렸던 한국도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오지 않았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입법 조처를 한다면 중국이 감시 시스템을 수출하려 들 때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짐머만은 대학 시절이던 1980년대 핵실험 반대 등 ‘불복종 운동’으로 체포되는 경험을 했고, 1991년 인권운동가와 활동가들의 활동을 보호할 수 있는 암호화 기술인 PGP를 개발했다. 미 당국이 암호화 기술을 군사 기술로 분류해 국외 수출을 막으면서 짐머만은 3년 동안 수사 대상이 됐다. 그러나 MIT출판사를 통해 PGP 코드를 출판하면서 군사기술 금수법을 우회해 전세계에 PGP를 전파시켰다.

김외현 13년 동안 한겨레에서 정치부와 국제부 기자로 일했고, 코인데스크코리아 합류 직전엔 베이징특파원을 역임했습니다. 신문, 방송,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 환경을 경험했으며, 새로운 기술과 오래된 현실이 어우러지는 모습에 관심이 많습니다. 대학에서는 중국을, 대학원에서는 북한을 전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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