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달 초 암호화폐 발행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어떤 경우에 암호화폐가 연방증권법 적용을 받는 증권으로 분류돼 제재를 받게 되는지, 어떤 경우에 법적 제재를 받지 않고 암호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내용을 떠나서 규제당국이 암호화폐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만으로도 블록체인 업계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증권거래위원회는 가이드라인 발표와 함께 전세여객기 서비스 회사 턴키젯이 발행하려는 암호화폐에 처음으로 ‘무제재 확인서’(No action letter)를 발급해줬다. 턴키젯의 암호화폐가 증권법에 저촉되지 않으니 제재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한 것이다. 턴키젯을 대리한 변호사는 무제재 확인서를 발급받기까지 11개월이 걸렸다고 밝혔다. 질의서와 건의서 등을 10통 이상 보냈고, 증권거래위원회 담당자와 50차례 이상 전화통화를 했다고 한다. 통화를 시작하면 한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고생했다는 푸념이 아니라 상대 공무원의 자세가 무척 진지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가이드라인에 대해 암호화폐로 가능한 혁신적인 사업모델을 지나치게 제약한다거나, 미국 밖에서 발행된 암호화폐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빠져 있다거나 하는 비판도 제기된다. 턴키젯의 암호화폐에 대해서도 혁신과는 거리가 먼 상품권에 불과하다는 비난도 나온다. 그럼에도 인내심을 갖고 블록체인 기업들과 대화하며 차근차근 규제의 틀을 만들어가는 증권거래위원회의 태도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가이드라인과 무제재 확인서를 시작으로 앞으로 더욱 발전된 규제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가 헛돼 보이지 않는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홈페이지의 기관 소개를 보면 첫번째 미션으로 ‘투자자 보호’를 꼽는다. 미국이라고 암호화폐 투기나 사기가 없을 리 없다. 암호화폐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내 눈에는 민원인과 1시간씩 통화를 했다는 미국 관료들이 전혀 보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참고로 한국 금융위원회의 첫째 목표는 ‘금융산업 선진화’다. 미국보다 훨씬 진취적이다.)

다음달 뉴욕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블록체인 행사 ‘컨센서스’에 참여하는 연사들의 면면을 보면 참 흥미롭다. 블록체인 업계 실력자, 증권거래위원회를 비롯한 규제기관의 고위 관료, 하원의원, 금융계 거물뿐만 아니라 휴고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휩쓴 인기 공상과학소설 작가 켄 리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릭 매스킨, 올리버 하트 하버드대 교수 등이 한자리에서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의 현재와 미래를 논한다. 미국의 저력은 분명 자유로운 상상력과 토론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 칼럼은 <한겨레신문> 4월11일자와 인터넷한겨레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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