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깃발. 출처=pixabay/GregMontani

암호화폐 기업에 대한 유럽연합의 자금세탁방지 규제(AMLD5)가 시행되자, 유럽 내 일부 암호화폐 기업들이 사업을 접거나 규제가 약한 곳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잇따르고 있다.

영국의 블록 매트릭스(Block Matrix)는 2019년 12월 비트코인 송금 서비스 ‘보틀페이(Bottle Pay) 사업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보틀페이는 트위터,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 계정끼리 소액의 비트코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로, 각 이용자에게 암호화폐 지갑을 제공했다.

그동안 보틀페이는 이용자의 소셜미디어 계정만 수집했다. 보틀페이는 사업 중단 사유와 관련해, “(AMLD5에 따라) 이용자로부터 수집해야 할 추가 개인정보의 양과 종류는 지금의 사용자 경험을 근본적이면서도 부정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이를 이용자들에게 강요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의 암호화폐 파생상품 거래소인 데리비트(Deribit)는 유럽을 떠나 중미에 위치한 파나마로 옮긴다. 데리비트는 “암호화폐 시장이 최대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새 규제는 대다수의 투자자들에게 규제와 비용면에서 높은 장벽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전세계 비트코인 옵션 거래의 95%를 차지한 데리비트는 지금까지 투자자들에게 여권 등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리비트는 파나마로 이전하면서 고객신원확인(KYC)을 하지 않으면 출금액을 제한하는 새 정책을 발표했다.

네덜란드에 설립된 마이닝풀 심플코인(Simplecoin)과 암호화폐 게임 플랫폼 촙코인(Chopcoin)도 사업을 종료했다. 심플코인은 홈페이지에서 "EU의 새 지침에 따르면 우리 서비스는 '수탁 지갑'으로 분류된다. 법이 시행되면 자금세탁방지를 위해 고객 여러분에게 개인정보를 요구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심플코인은 "그동안 여러 방법을 모색했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면서 사업을 종료한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은 2018년 6월 제5차 자금세탁방지지침(AMLD5)을 개정했고 2020년 1월10일부터 시행했다. EU 28개 회원국들은 암호화폐 관련법을 제·개정해 새 지침을 법에 반영해야 한다. 이에 따라 각 회원국 규제 당국은 암호화폐 거래소 등을 대상으로 고객신원확인(KYC) 규정과 자금세탁방지(AML) 규정을 강화하고 있다. 암호화폐 거래소와 지갑 등 수탁업체들은 당국에 등록하고, 고객의 거래를 모니터링하다 의심거래를 발견하면 보고해야 한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국제기준과 궤를 같이하는 EU AMLD5의 목적은 누가 암호화폐 거래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규제 당국은 이를 통해 마약, 탈세 등과 연계된 불법자금의 세탁과 테러자금조달을 방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탈중앙화가 블록체인의 정신이라고 믿는 이들은 규제 강화에 강하게 반발한다. 규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의 구조조정도 예상된다. ‘특정금융거래정보법(특금법)’ 개정 후 한국 암호화폐 업계가 비슷한 행보를 보일 가능성도 있다.

반면, 규제를 갖춘 제도권에 편입돼야 암호화폐가 금융산업에 진입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엑스레그 컨설팅(xReg Consulting)의 시안 존스 이사는 코인데스크에 "(AMLD5 등이) 일부 기업의 폐업과 합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암호화폐 업계 전체가 비용 증가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인수합병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 암호화폐 거래소들도 최근 특금법 개정에 대비해 AML 통합 솔루션 도입에 나서고 있다.

규제가 명확해지면 금융기관이 암호화폐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좀 더 열린다. 코인데스크의 리서치 디렉터 노엘 애치슨(Noelle Acheson)은 "자금세탁에 관한 금융기관의 우려 때문에 많은 암호화폐 기업은 은행 계좌 개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우려가 사라지면 기존의 은행 네트워크를 활용해 인프라가 성장하고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은행 등 금융기관이 암호화폐 사업에 진출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다. AMLD5와 별도로 독일에선 은행법이 개정돼 은행들이 암호화폐 수탁에 직접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금융기관이 암호화폐 사업을 시작하면, 전통 금융권의 기관투자자들이 암호화폐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이는 암호화폐 시총을 폭발적으로 키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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