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셔터스톡
출처=셔터스톡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수십 년이 지나가기도 하고, 수십 년간 일어날 일이 단 몇 주 만에 일어나기도 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한 것으로 알려진 저 말이 실감 날 만큼 지난 한 달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당연한 일상으로 여겨지던 우리의 삶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송두리째 흔들렸고, 전통적인 금융시장과 암호화폐 시장도 전례 없는 혼란을 겪었다.

금융시장 혼란의 중심에는 미국 달러가 있었다. 전통적인 투자자들이 종전에 안전자산으로 여기던 여러 자산에서 안전성이 더 높은 확실한 미국 달러로 갈아타는 현상이 나타났다. 현재 S&P 500지수는 2020년 들어 미국 달러 대비 20%나 하락했고, 원유는 62%, 영국 파운드는 9%, 러시아 루블과 브라질 헤알은 각각 25%씩 내렸다.

오랜 기간 암호화폐 시장은 전통적인 시장과 독립적으로 움직였지만,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하면서 퍼블릭 블록체인들이 사실상 미국 달러에 연결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맡게 됐고, 자연히 암호화폐와 전통적인 시장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겼다. 블록체인에서 달러는 XRP와 비트코인캐시(BCH)를 제치고 비트코인과 이더(ETH) 다음으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자산이 되었다. 거래량 기준으로만 보면 달러가 비트코인을 앞지르는 상황이다.

블록체인상에서 거래되는 자산의 비중 (녹색: 이더, 빨간색: 비트코인, 파란색: 스테이블코인)
블록체인상에서 거래되는 자산의 비중 (녹색: 이더, 빨간색: 비트코인, 파란색: 스테이블코인)

이들은 달러 연동 화폐라는 특성 때문에 달러의 글로벌 수요 변화뿐 아니라 연준(Fed)의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받는다.

개당 9천 달러 대에 머물던 비트코인 가격이 3월 중순 5천 달러 선에서 안정되기 전 한때 4천 달러 이하까지 곤두박질치자, 스테이블코인에 20억 달러가량이 유입됐다. 블록체인에서 통용되는 자산만 놓고 보면 스테이블코인이 33%나 늘어난 것이다. 전통적인 시장에서 달러 수요가 급증한 것과 같이 스테이블코인 수요도 사상 최대 수준으로 증가했다.

스테이블코인 중에서도 테더(USDT)를 통한 유입이 가장 많았다. 연초부터 현재까지 15억 5천만 달러 이상의 자금이 테더를 통해 블록체인에 유입됐고, US달러코인(USDC)과 바이낸스USD(BUSD)도 각각 1억 7천만 달러와 1억 5천만 달러 정도 증가했다.

스테이블코인의 수요가 증가하면 투자자들은 토큰 가격을 (기준 가격인) 개당 1달러 이상으로 올려 책정하게 된다. 그러면 차익거래 기업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스프레드가 상쇄될 때까지 공급량을 늘리게 된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이 테더에 1천만 달러를 입금하고 개당 1달러인 USDT토큰 1천만 달러어치를 구입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기업은 구입한 토큰을 1달러가 조금 넘는 가격에 팔아 차익을 수익으로 챙길 수 있다. 지난달 USDT의 수요가 늘면서 개당 거래가가 꾸준히 1달러 이상을 유지했고, 그렇게 15억5천만 달러라는 자금이 블록체인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 출처=코인 메트릭스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 출처=코인 메트릭스

그렇다면 투자자들은 왜 현시점에서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크게 3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투자자들이 폭락장 이후 고위험 암호화폐 자산에서 안전자산인 달러로 몰려들었다. 실제로 필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암호화폐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무연관자산군(uncorrelated asset classes)이던 암호화폐의 가격이 증시와 함께 급락하자 보유하고 있던 암호화폐를 단기 매도한 경우를 보았다.

둘째,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신흥시장 화폐의 달러 대비 가치가 지속해서 하락하면서 달러 수요가 크게 늘었다. 특히 역외 거래가 가능한 USDT 같은 경우는 중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브라질 등지에서 자국 화폐를 달러로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로 떠올랐다.

셋째, 자가 격리와 여행 금지 조치로 당분간 현금의 이동, 특히 국가 간 이동이 매우 어려워졌다. 블록체인상의 달러는 제대로 사용하면 별도의 승인 없이 접근할 수 있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현금과 비슷한 특징이 있고, 그래서 적어도 당분간은 현금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주요 금리. 출처=트레이딩뷰
전 세계 주요 금리. 출처=트레이딩뷰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 달러의 주요 예치 수단으로 부상했지만, 스테이블코인도 결국에는 달러 통화정책의 영향을 받는다. 지난 15일, 미국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경기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기준 금리를 기존의 1%에서 0 혹은 심지어 -0.25%까지 인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금리 인하는 실제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의 사업모델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이들의 수익 창출 방식을 살펴보면 된다. 현재는 다음 두 가지 방식이 가장 널리 사용된다.

첫 번째는 시중은행을 상대로 대출을 해주거나 미국 국채 등 AAA 등급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보유 자산을 투자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주요 스테이블코인에 몰린 투자자 자금은 총 55억 달러에 달했다. 금리를 1.25%로 계산했을 때 최대 6875만 달러의 이자 수익을 낼 수 있는 자금이었다.

연준의 기준금리는 말 그대로 모든 시중 금리의 기준이 되는 금리다. 당연히 테더나 USDC 같은 코인 발행사들은 예치금을 투자해 이자 수익을 올리기가 어려워진다. 유럽이나 일본처럼 마이너스 금리가 된다면 예금을 맡기고 이자를 받는 대신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가 더 커질 수도 있어 스테이블코인 사업 모델이 큰 타격을 입는다.

수익이 감소하면 스테이블코인 운영사들이 기업이 발행하는 민간 채권처럼 수익률과 위험이 모두 높은 자산에 투자할 거란 우려가 나온다. 유로나 엔 연동 스테이블코인이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두번째는 테더 등 일부 운영사들이 내건 예금 및 상환 수수료 0.1%다.이 또한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USDC 등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는 스테이블코인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제로금리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새로운 사업모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예를 들어 USDC는 법정화폐 기반 신용카드를 포함한 API 결제, 월릿, 시장, 사업용 계좌 등을 만들어 사실상 시중은행으로 변모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스테이블코인 운영사들이 이용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예치된 토큰에 비해 토큰 공급량을 대폭 늘려 사용세 명목으로 수수료를 걷거나, 팩소스스탠더드(PAX)가 금 연동 토큰에 이미 적용하고 있는 것처럼 추가 거래수수료를 부과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용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면, 이용자들이 WETH(wrapped ETH)과 ETH처럼 원래의 토큰을 신뢰할 수 없는 계약에 묶어(wrap) 거래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중앙화된 거래소들이 해당 토큰에 대한 지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 또다시 권력 집중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는 데 따르는 기회비용은 사실상 0에 가깝다. 이자에 기댄 수익 창출은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를 밝게 점칠 만한 이유가 있다. 앞으로 전통적인 금융권의 실질 은행 금리가 마이너스로 내려가고, 신흥 시장 화폐의 달러 대비 가치가 급락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자금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유입될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치를 이용자들이 인정하는 한 스테이블코인 운영사들은 지속가능한 새 사업모델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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