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B 패스포트(Plan B Passports)의 설립자 케이티 애나니나는 암호화폐 커뮤니티의 부자들이 세제 혜택을 많이 주는 국가에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출처=케이티 애나니나
플랜B 패스포트(Plan B Passports)의 설립자 케이티 애나니나는 암호화폐 커뮤니티의 부자들이 세제 혜택을 많이 주는 국가에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출처=케이티 애나니나

자신만의 요새를 짓고 있는 케이티 애나니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꿈을 널리 알리고 있다.

러시아 이민자인 애나니나는 지난해 미국 마이애미, 휴스턴, 샌프란시스코, 덴버, 그리고 미국령인 푸에르토리코, 또 카리브해에 있는 여러 섬과 멕시코 과달라하라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베이스캠프로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건 그의 라이프스타일이기도 했지만, 직업 때문이기도 했다.

애나니나는 비트코인 투자자들을 주 고객으로, 조세 회피처 6개국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국가에서 합법적인 주거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랜B 패스포트(Plan B Passport)란 회사를 설립했다. 플랜B 패스포트는 이주 관련 사업체 마이그로니스 시티즌십(Migronis Citizenship)의 자회사로, 마이그로니스 시티즌십은 이미 전 세계에 5개 영업점을 운영 중이다.

지난 4월 과달라하라에서 무정부 자본주의자들과의 회의를 앞두고 애나니나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최상급 고기를 원할 땐 최상급 고기를 파는 정육점에 가고, 최고 품질의 과일이나 채소를 원할 땐 최상급 청과류를 파는 농부에게 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위해서도 그렇게 쇼핑을 하고 있는가? 조세 회피처의 여권을 갖게 됨으로써 얻는 혜택이 더 많다면 그렇게 안 할 이유가 있는가?”

조세 제도가 생긴 이래로 납세를 피하려는 노력은 줄곧 계속돼 왔지만, 암호화폐 커뮤니티의 부자들은 국경이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 기술과 모든 중앙 권력의 존재를 비판하는 이념에 힘입어 조세 회피에 들이는 노력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있다.

플랜B 패스포트 홈페이지에 따르면 플랜B는 모기업과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소유물, 자산 등을 최상의 관할 구역으로 이전함으로써 개인의 납세 전략을 합법적으로 최적화하는 방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애나니나는 20분 무료 상담 서비스뿐만 아니라 가끔 온라인 세미나도 여는데, 최근에는 다음 경기 호황기에 많은 부를 축적해 호화로운 저택을 살 여력이 있는 부자들을 잠재 고객으로 삼아 개인 소유의 섬에 있는 부동산 시장에 진출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플랜B 패스포트는 암호화폐 커뮤니티 내에서 합법적인 조세 회피 전략을 찾는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케이티 애나니나
플랜B 패스포트는 암호화폐 커뮤니티 내에서 합법적인 조세 회피 전략을 찾는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케이티 애나니나

이처럼 공개적으로 납세를 피하는 접근 방식은 100% 합법이다. 또한, 다국적 기업이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세금을 안 내거나 덜 내려고 회사 자금을 여러 장소로 옮기는 것을 생각했을 때 최근엔 이런 관행이 정상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애나니나는 “수많은 사람이 이미 하고 있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 시티대학교 국제정치학과에서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조세 회피처와 역외 금융을 연구하는 이스라엘 출신 경제학자 로넌 팰런은 최상위층 부자들 사이에서 최근 조세 회피 전략의 인기가 점점 늘고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했으나,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외로 이주해 납세 부담을 피하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보통 본인이 탈세자라고 밝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줌(Zoon) 화상회의를 통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팰런은 “납세를 회피하는 사람들 중 소수만이 실제로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 수가 적지는 않아 우리는 그들을 ‘PNT(Permanently Not There, 영구 거주지를 바꾼 사람들)’라는 공식 용어로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자들은 각기 다른 주소 3곳에 집을 3채 가지고, 한 국가에서 납세 의무를 져야 할 만큼 긴 기간을 머무르지 않으며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또 최근에는 주거권이라는 허울뿐인 형식을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이들마저 느는 추세다.

 

깃발 이론

요즘 많은 해외 거주자나 조세를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개인이나 가족 차원에서 자유주의자이자 자산관리 전문가인 해리 슐츠의 조언을 따르고 있다. 슐츠는 사람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조세와 규제, 경제 체제에 따라 각기 다른 국가에 깃발을 심는 이른바 ‘3개의 깃발 이론(Three Flag Theory)’을 만들어 삶과 시민권에 대한 전략적 접근법을 설명했다.

슐츠의 깃발 이론 지지자들은 조세 회피처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영주권을 취득하거나 여권을 필요한 개수만큼 발급받아 본인의 자본과 사업 서류를 여러 나라로 옮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국가에 대한 의무는 최소화하기 위해 세계 시민이 되거나 영원한 여행자로서의 삶을 택한다.

팰런 교수는 “한 발은 뉴욕에, 한 발은 케이맨 제도에 담가놓고 어떤 국가에 대한 책임도 없이 자기 자신만 책임지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자유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UC 어바인의 머니 연구소장 빌 모러는 이를 ‘후기 자본주의 노마디즘’이라고 불렀다), 팰런은 이게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며, “많은 사람이 국가가 주는 혜택은 누리되 세금은 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라 설명했다.

슐츠의 ‘3개의 깃발 이론’을 차용해 또 다른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들도 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사라지는 법(How to Disappear)’의 저자 프랭크 어헤안은 슐츠의 이론을 ‘6개의 깃발 이론(Six Flag Theory)’으로 발전시켰다. 요즘 사이버공간에서 하나의 e-피난처를 최소 1개 이상의 깃발로 나타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여기서 e-피난처란 개인이나 기업용 서버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해 규제가 느슨한 국가를 의미한다.

기업들의 해외 이전을 돕는 파 호라이즌 캐피털(Far Horizon Capital)의 마크 그라스 상무이사는 “해당 이론이 처음 알려진 지 30년이 훨씬 넘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쯤 대부분 정부가 이론을 연구해 이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허점을 바로잡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서구 국가들의 경우 계속 이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반면, 주로 남반구에 있는 가난한 국가들이나 모나코 같은 부유한 나라는 이민 정책을 단순화하고 거주의 정의를 느슨하게 만듦으로써 고액 자산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상적인 ‘피난처 국가’에서는 무비자로 여러 국가에 여행이 가능하고, 국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과세 한도가 정해져 있다. 또 이 중 많은 국가가 자산이나 자본 소득에 대한 과세 정책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낮은 수준을 보인다.

애나니나는 “사람들의 재산을 두고 말 그대로 국가들끼리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자기 일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는 “과거를 돌아봤을 때 내 일생이 비트코인과 무정부주의, 깃발 이론을 위한 준비였단 생각이 든다. 만약 완벽한 무정부 상태에 있을 수 없다면 내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줄 서류를 몇 장 쓸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서류를 많이 획득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비트코인에 친화적이면서 반정부적이고, 온라인 시스템에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건 애나니나뿐만이 아니다. 비트코인 네트워크의 초창기 지지자 중 하나인 로저 버도 깃발 이론을 믿으며, 국가에 부채가 전혀 없는 상태인 개인의 자율을 극대화하는 삶을 살고 있는 좋은 예다.

인터뷰에서 그는 “최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버는 지난 2006년 미국을 완전히 떠나 2014년부터 세인트키츠네비스 국민이 됐다.

그러면서 “교도소에 수감되는 순간, 난 다시는 내가 미국에서 살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버는 지난 2002년 이베이(eBay)에서 폭발물을 판매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미국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던 날, 나는 곧바로 미국을 떠나왔다. 그러고 나서도 시민권을 말소하는 데까지 8년이란 세월이 더 걸렸다”고 말했다.

케이티 애나니나는 "사람들의 재산을 두고 말 그대로 국가들끼리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케이티 애나니나
케이티 애나니나는 "사람들의 재산을 두고 말 그대로 국가들끼리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케이티 애나니나

버는 암호화폐 커뮤니티에 있는 많은 친구 역시 인구 5만2441명의 작은 카리브해 섬나라인 세인트키츠네비스의 국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명확했지만, 국민이라고 해서 반드시 섬에 발을 들이고 함께 사는 이웃이란 뜻은 아니다. 그는 “2년 전쯤에는 100명가량이 함께 모여, 열대 낙원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오후를 보냈었다”고 회상했다.

버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어떻게 하면 해외로 이주할 수 있는가?’란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그는 사람과 절차를 잘 이해하고 있는 평판 좋은 에이전시를 알아보라 조언한다고 말했다. 상당한 액수의 돈을 두 번이나 사기당한 경험을 떠올리며,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사기를 치려 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버가 경험한 것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애나니나가 설립한 플랜B 같은 작은 규모 회사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들은 정부의 투자시민권(Citizenship By Investment Unit, CBIU)부서와 함께 일하며 사람들이 수수료를 지불하고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한 다음 투자 이민 제도를 통해 정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절차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시민권을 얻는 데 대부분 수십만 달러(수억 원)의 비용이 든다. 버는 “저렴한 비용이 아니”라고 말했다.

암호화폐 커뮤니티의 부자들만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로는 플랜B 패스포트가 최초일 테지만, 많은 기업이 이 사업을 이민 업계 안에서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분야로 보고 있다.

마이그로니스 시티즌십의 마케팅 총괄 마르틴 코밸코는 지난 2012년 8월 이래 자사가 이주를 도운 고객 수만 500명가량 된다고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그는 플랜B 패스포트가 분사하기 전 시점을 기준으로, 그중 10% 정도가 암호화폐 커뮤니티 사람들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파 호라이즌 캐피털의 그라스는 암호화폐 초창기 투자자들과 거래소, ICO(암호화폐 공개) 운영업체들을 자사 고객으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진 않았으나, 많은 고객이 상당한 액수의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암호화폐를 통해 맺는 관계

영원한 여행자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이 정부가 지원하지 않는 화폐를 보유하거나, 암호화폐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이 깃발 이론을 지지하는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라스는 “깃발 이론의 개념과 비트코인(또는 다른 암호화폐)이 본래 자유와 자율, 그리고 권위나 중앙 권력에의 저항 같은 자유주의적 원칙에 기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개념들은 상호 증폭 효과가 있다. 그라스는 인터넷 같은 분배 기제로 인해 사람들이 이러한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깃발 이론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또 암호화폐는 사람들이 국경을 더욱더 쉽게 넘을 수 있게 했다. 로넌 팰런은 수십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금을 은행 시스템을 통해 옮긴다면, 당국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다양한 규정들, 특히 자금세탁방지 관련한 규정들이 있다. 은행들은 기본적으로 계좌 주인이 누구인지, 자금 출처는 어디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갖가지 질문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트코인의 급진적 소유권 덕분에 사람들은 규제 당국이나 금융 기관의 규제 담당자에게 연락해 일일이 신고하지 않고도 자산을 바로 옮길 수 있게 됐다고 애나니나는 설명했다. 그는 “미국 안에서 자산을 처분할 걱정을 한다거나, 은행 시스템을 거쳐 자산을 어떻게 해외 계좌로 옮길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계산기만 들고 해외로 송금하면 바로 입금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요새

전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는 생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국가와는 독립된 반정부적 국내 시스템을 구축해 국내에 머물길 바라는 비트코인 투자자들도 분명히 있다.

트위터에서 ‘미즈호들(MsHodl)’로 잘 알려진 저스틴은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양부모님으로부터(가끔은 전기공과 배관공의) 도움을 받아 가족 소유의 한 오래된 농가를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저스틴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있는 오래된 목장을 개조하고 있다. 출처=저스틴
저스틴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있는 오래된 목장을 개조하고 있다. 출처=저스틴

저스틴은 ‘요새’라는 단어를 처음 듣기 전부터 자신은 요새를 꿈꾸고 있었다고 말했다. ‘요새(citadel)’란 비트코인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일하고,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목가적인 미래의 모습을 뜻한다. 정부나 기업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 목표다. 미개발 상태인 개인 소유의 섬에서 요새를 짓는 게 얼마나 실용성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애나니나는 “우리는 무정부주의자다. 수돗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요새란 그보다 넓은 차원의 기술 분야가 받아들인 ‘디지털 노마드’와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면서, 또 그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정부의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자신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짓는데, 이 요새들은 의도적으로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정 지역에 위치하게 된다.

저스틴은 납세를 피해 자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을 이해한다면서도, 재정적 자율은 자기 주권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독립이란 때론 정착하고, 무언가를 지어 올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는 “궁극의 자유란 많은 책임을 동반하며, 그 기반에는 소유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소규모로 사업을 운영하는 저스틴은 자신이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일하고 최소한의 세금만을 내며, 존재하는 모든 허점을 찾아내려 한다. 우리는 정부와 폭력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세금은 그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잃을 게 있는 사람들은 납세를 완전히 피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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