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화폐의 영향력을 직시하고 있는 미국 정부는 감시와 소프트 파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출처=Unsplash
디지털 화폐의 영향력을 직시하고 있는 미국 정부는 감시와 소프트 파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출처=Unsplash
본 기사는 글로벌 통화 시리즈의 두 번째 기사로, 첫 번째 기사는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요인들을 다루고 있다.

반 세기 전 오늘인 1971년 8월 15일,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기념비적인 발자국을 내딛었다.

세계 2차대전 종식 이후, 미국은 가장 최근에 경제 발전을 이룬 국가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자국 달러를 글로벌 환율 제도의 기축통화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2차대전 이후 달러는 전쟁 중 미국이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군수물자를 공급하며 축적한 막대한 금 보유량을 바탕으로 힘을 키웠다.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수립된 국제 통화 체제인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체제는 유럽과 일본의 쇠락한 경제 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71년 무렵이 되자, 경제 재건 중이던 위 국가들은 금을 등에 업은 달러에 큰 위협으로 떠올랐다. 유럽과 일본의 수출이 상승하며 세계 무역에서 미국의 비중이 줄어들었고, 이는 미국 화폐에 대한 수요 감소로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초과 지출 문제가 발생하면서 금 1온스를 35달러에 고정시키는 고정환율제(peg)가 달러를 과대평가했다는 의견이 퍼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달러는 점차 빠른 속도로 금으로 태환되었는데, 이는 달러의 고정환율이 무너지면 달러 보유자들이 파산할 지도 모르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마침내 50년 전인 1971년,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달러-금 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비록 그 과정은 몇 년이 걸렸지만, 금본위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브레튼우즈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금-달러 태환 중단이 세계 경제사에서 갖는 의의는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주장이 많다. 닉슨 대통령이 종식시킨 ‘금본위제’는 아주 특수한 상황 하에서 시행되었으며 채 30년도 유지되지 못했다. 그 자리에는 결국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변동 환율제가 도입되었다. 자유 변동 환율제에서 화폐의 상대적인 가치는 발행국가의 경제적 영향력과 정치적 안정성에 따라 달라진다.

유럽과 일본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로 인해 도입된 새로운 통화 체제는 여전히 (금이 부재한) 미국 달러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 그 후 약 반 세기 동안 미국 달러는 세계 무역의 지배적인 통화로 기능했으며 안정적인 가치 저장 수단을 찾는 외국 중앙은행의 압도적인 선택을 받았다. 본 시리즈의 첫 번째 기사에서 다루었듯이, 그 결과 미국은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는데 이를 달러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이라 부른다.

그러나 현재 달러 패권의 현상유지(status quo)는 무너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야기한 인플레이션은 달러의 지위 하락에 대한 우려를 초래했으나, 문제는 이것이 훨씬 장기적인 추세라는 것이다. 올해 5월, 중앙은행의 기축통화 보유량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5년 간 최저치인 59%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달러의 비중 감소는 상당 부분 유로, 일본 엔화 그리고 중국 위안화의 상승세에 기인한다. 아직 존재감이 미미하지만 암호화폐라는 또 다른 경쟁자도 있다. 암호화폐 지지자들은 오랫동안 비트코인이나 다른 디지털 자산이 글로벌 기축통화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최근 들어 영국은행(Bank of England) 전총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 또한 초국가적인 디지털 기축통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현재 전세계의 기축통화 상황은 더 이상 승자독식의 구조가 아니다. 약 1세기 동안 이어진 달러 독식지배는 이례적인 경우였으며, 전문가들은 21세기에는 더 이상 단일 통화나 수단이 시장을 지배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다음 중 어떤 통화가 달러로부터 기축통화 시장의 상당한 지분을 뺏어올 것이며, 그에 수반되는 지배력과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인가?

출처=Robert Anasch/Unsplash
출처=Robert Anasch/Unsplash

유로

유로는 잠재적인 전세계 기축통화로써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나 스페인과 같이 경제 운용에 실패한 일부 국가들도 있지만, 유로존은 대부분 건강하고 잘 규율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당 국가들의 총 GDP는 중국보다 약간 높다.

또한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ECB) 역시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상당히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0년에는 공포스러운 위기를 한 차례 겪기도 했는데, 그리스의 구제금융을 집행했고 당시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던 유로존의 해체를 막아냈다.

따라서 유로가 이미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기축통화이며 전세계 중앙은행 지급준비량이 약 2.5조 유로(2.94조 달러)에 이른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로가 기축통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다. 유로의 이자율 및 각종 재정 정책에 대한 권한은 6명의 집행위원과 19명의 유로존 중앙은행 총재들로 구성된 유럽중앙은행 이사회(Governing Council)가 결정한다. 즉, 회원국들 간 재정 정책에 관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지배구조의 정체 또는 붕괴가 발생하여 보다 일원화된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에 비해 큰 위험이 초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스탠포드대 경제학 교수 대럴 더피(Darrell Duffie)가 주장하는 유로의 기축통화화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유럽중앙은행이 과거 수년간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범유럽 채권(Europe-wide bonds)을 발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럽 각국의 중앙은행은 유로화가 표기된 채권을 발행하기는 하지만, 이는 유로존 전체의 강점이나 약점을 반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각 국가의 채권은 저마다 독립적인 수익률을 가진다. 따라서 유로가 기축통화로 사용될 경우 복잡성과 위험이 증가된다. 채권은 화폐보다도 외국 중앙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 통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므로, 진정한 ‘유로 채권’이 없다는 것은 기축통화로써 유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제한한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 유럽연합은 지난 10월 팬데믹으로 인해 발생한 부채의 자금 조달을 위해 최초로 대규모 유럽 공동 채권을 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공동 채권은 시장에서 큰 문제없이 수용되었으며, 유럽위원회는 향후 5년 간 약 9천억 유로(1.06조 달러)를 차입할 계획이다. 발행된 채권의 매입 주체는 다양하겠지만, 현재 약 7조 달러에 달하는 중앙은행의 달러 채권을 대체하기에 충분한 금액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공동 채권 발행이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피 교수는 “공동 채권을 앞으로 더 많이 발행할지, 더 적게 발행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번 공동 채권 발행은 새로운 시작을 알렸으므로, 앞으로 이러한 채권을 더 많이 발행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더피 교수는 공동 채권 발행은 단순히 기축통화 시장에 자산을 추가하는 것을 넘어 유럽의 정치적 결속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 채권의 기능을 강화시킬 것이라 주장한다.

(참고: 과거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파운드는 기축통화 관련 논의에서 일반적으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중국의 1/5, 일본의 1/2 정도로 상대적으로 작은 영국의 경제 규모 때문이다.)

출처=Tianshu Liu/Unsplash
출처=Tianshu Liu/Unsplash

엔화

일본 엔화의 상황은 기축통화 지위 논의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엔화는 중국의 위안화가 직면한 과제들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수출 중심의 전후 경제 재건 전략에 뿌리내린 고립주의 경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국가 부채가 자국 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가용 엔화가 제한된다.

투자은행 나티시스(Natixis)의 아태지역 수석연구원 앨리시아 가르시아-헤레로(Alicia Garcia-Herrero)는 “일본은 한번도 엔화의 기축통화화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국가들은 기축통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금을 조달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이 국가들은 자산을 매수한다.”

달리 말하면, 어떤 국가가 순수출국이라면 해당 국가는 국채가 전세계 기축통화로 사용될 만큼 충분한 대외 부채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40년 동안 평균 30%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한 일본의 높은 저축률 역시 자국 국채에 대한 높은 수요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달러로 다시 돌아가보면, 다소 독특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바로 미국 달러가 지배적인 기축통화인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자국의 재정적 수단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출처=Eric Prouzet/Unsplash
출처=Eric Prouzet/Unsplash

위안화

오늘날 위안화는 달러에게 마치 도깨비 같은 존재다. 무대 밖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빛보다 어두움이 더 큰 위협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최소 10년 넘게 자국의 화폐를 매력적인 기축통화이자 교역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으며, 세계 2위 경제강국으로서 충분히 그럴 만한 역량이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중국은 홍콩에 역외 채권 시장을 형성하기도 했으나, 중국공산당의 국내 자본 통제에 대한 욕망과 대외 시장의 위안화 흐름 간에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최근 일각에서는 중국의 ‘디지털 위안’ 프로젝트가 기술적 우위를 선점함으로써 무역 거래에서 위안화의 비중을 늘리고, 종국에는 위안화의 기축통화화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중국 정부의 시도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위안화가 가까운 미래에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최근 주목받았던 중국공산당의 예기치 못한 전면적인 금융 기술 단속에서 드러났듯이, 중국 내 정치 안정 및 법치주의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비트코인 채굴자들은 정부 단속의 대상이 되었으며, 중국 주식 시장의 상당 부분 및 해외 상장된 중국 주식 역시 단속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대규모 회계 조작 혐의가 드러난 중국 루이싱커피(Luckin Coffee) 등이 그 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인 조셉 설리반(Joseph Sullivan)은 중국공산당을 기축통화인 달러의 ‘누구도 몰랐던 아군(unwitting ally)’라는 별명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부 개입과 시장 붕괴는 중국의 자유 시장에 대한 의지, 엄격한 정부 규제, 궁극적으로 중국 경제의 저력에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예상되는 결과는 최근 중국의 금융 산업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15년 6월 주식 시장이 붕괴되었고, 이후 중국 중앙은행은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위안화 가치를 절하했다.

이 모든 것은 중국이 가진 위안화 기축통화화라는 야심의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서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위안화 통제는 중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있어 핵심축으로 작용했지만, 위안화의 기축통화화라는 목표와는 양립 불가능하다.

일본이 중국과 비교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1970년 후반의 개혁 이후, 중국은 일본의 전후 경제 재건을 모델로 삼아 개발을 단행했으며, 특히 국내 투자를 통해 수출 기반의 경제를 건설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중국공산당은 애플 하청업체의 공장 건설을 위해서건, AI 개발 자금 조달을 위해서건 간에 국내 자본은 내수 시장에 투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국내 자본의 해외 유출은 강력하게 통제되고 있다.

출처=Wu Yi/Unsplash
출처=Wu Yi/Unsplash

그러나 위안화가 기축통화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거래가 가능해야 한다. 국가들은 지급준비금의 유동성 확보를 통해 미국 국채 매각 광풍을 일으킨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이 예기치 못한 시장 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중국은 “자본계정을 개방”하거나 자국 자본의 자유로운 국내외 이동을 허용해야 한다.

하지만 신미국안보센터(Center for a New American Security, CNAS)의 에밀리 진(Emily Jin)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자본계정을 개방할 계획이 없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은 자본계정을 개방한 이후 곧바로 대규모의 자본 유출이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 주식 시장에 고조된 불안으로 인해 이러한 중국의 우려는 더욱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대외 시장에서 신뢰 가능한 큰 수익을 도모하는 중국 투자자들에 의해 주요한 자본 유출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중국의 첫 번째 시도는 201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바로 위안화 채권을 거래할 수 있는 역외 시장을 포함한 투티어(two-tier)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위안화를 대외 교역이 가능한 위안화, 그리고 자국에서 거래되는 위안화 두 종류로 나누려고 했다.” 가르시아-헤레로 연구원은 말했다. “하지만 2015년 대규모의 주식 시장 조정으로 인해 중국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가르시아-헤레로 연구원은 현재 중국 중앙은행이 과거와 유사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중국 중앙은행이 직접적으로 완전히 통제 가능한 전자 화폐인 디지털 위안화를 만드는 것이다.

“굉장히 창의적인 시도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은 화폐 강제전환의무를 피할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의 경우] 정부가 모든 거래내역을 알 수 있다. 즉 누군가가 너무 많은 자금을 인출하는 경우, 정부가 다시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가르시아-헤레로 연구원은 중국 정부의 이러한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밝혔다. 자칫 계획이 악용될 가능성이 많고, 중국 지도부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디지털 위안화라는 기술적 혁신을 통해 중국이 위안화를 매력적인 기축통화로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디지털 화폐는 기존의 달러에 비해 빠른 속도와 다양한 실용적인 이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 하지만 에밀리 진 연구원은 단순한 기술적인 업그레이드가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힘들 것이라 보고 있다. “물론 마찰비용이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이 사람들이 미국 달러에 돈을 넣어두는 이유는 아니다.”

이렇듯 대립되는 여러 세력들 간 팽팽한 싸움은 중국이 가진 기축통화 야심에 상당한 방해요인이 되었다.

위안화는 현재 전세계 지급준비 통화량의 2.3%를 차지하며, 그 뒤를 캐나다 달러가 2%로 바짝 쫓고 있다. 캐나다 경제는 중국의 1/8 규모이며, 캐나다는 자국 통화의 기축통화화를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출처=Thought Catalog/Unsplash
출처=Thought Catalog/Unsplash

비트코인 등등

마지막으로, 비트코인이 전세계 기축통화로써 갖는 잠재력은 어떠할까?

비트코인의 기축통화화 논의는 가치저장의 수단으로서 사용자들이 비트코인을 채택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한 국가의 중앙은행이 무분방한 화폐 발행을 통해 국민들이 보유한 화폐 가치를 떨어트릴 수 있듯이, 외국 중앙은행 역시 각 국 정부가 보유한 채권에 동일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다수의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전세계 국가들이 보유한 지속불가능한 수준의 높은 부채를 지적하며, 이번 21세기에 국가채무불이행이 만연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나리오에서 비트코인은 일종의 안전장치이며, 일련의 채무불이행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질(hard)” 자산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엘 살바도르가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비록 중앙은행의 공식 지급준비 통화는 아니지만) 자국의 법정화폐로 채택하면서 이러한 아이디어는 허구가 아닌 현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보다 깊이 분석하면,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며 빈곤한 소규모 국가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사용한다면 이는 비트코인을 보유한 다른 국가들에게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

엘 살바도르는 이미 미국 달러를 주요 통화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 중앙은행의 영향에 특히 취약하며 자국의 화폐 공급을 스스로 관리하지 못한다. 따라서 엘 살바도르 이외에 다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소규모 국가들 또한 중립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비슷한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이외에도 국가들이 비트코인을 기축통화로 채택할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밸리더스 파워(Validus Power) CFO이자 오랜 채권 트레이더인 그레그 포스(Greg Foss)는 최근 사우디 아라비아와 러시아 같은 산유국들이 비트코인을 결제수단으로 채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해당 국가들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미국과 양면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미국이 달러로부터 얻는 힘과 영향력을 감소시키고자 한다.

일례로 러시아의 경우, 미국은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조치를 개인들에게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석유 교역량은 엄청나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석유 결제 수단으로 채택된다면 국가를 포함한 여러 시장 주체들은 비트코인을 보유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석유의 예시는 비트코인이 가진 지정학적인 장점을 보다 잘 보여준다. 석유 생산국들은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다양한 국가들과 교역하는데, 이는 해당 국가들의 자체 통화 승인을 덜 매력적이게 만들고 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달러를 통한 거래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제3자(a trusted third party)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교역에서 비트코인과 같은 중립적인 수단을 활용하면 가치 이동의 매개채로서 미국이 가진 지정학적 영향력을 활용하지 않고도 교역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화폐가 교역에서 사용되는 것과 해당 화폐가 기축통화로써 갖는 유용성 사이에는 약한 관계만이 존재하며, 전문가들은 비트코인이 기축통화로 사용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는 여전히 일일 시세가 두 자릿수로 크게 변동하는 비트코인의 높은 가격 불안정성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환율이 기축통화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아니다. 경제학자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은 큰 폭의 인플레이션 그 자체만으로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빼앗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비트코인의 수용도가 높아지면 시간이 따라 비트코인의 가격이 안정화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높은 변동성은 분명 기축통화 후보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질이 아니다.

비트코인의 풀뿌리(grassroot) 생태계 역시 또 하나의 문제다. “우리 모두는 [비트코인이] 하나의 큰 신용이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미국안보센터에서 비트코인과 지정학을 연구하는 야야 퍼내지애(Yaya Funasie) 전 CIA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신용이란 프로토콜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존재한다. 또한 현재 비트코인 채굴자와 개발자의 중요성은 아주 높아져 있다.

프로토콜은 X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문제를 들여다봤을 때 개발자들이 포크(fork, 개발자들이 하나의 소프트웨어 소스코드를 통째로 복사하여 독립적인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법적 대응책을 사용해야 하는가?”

반대로 비트코인은 이미 건전한 명목화폐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다. 비트코인은 국가의 자금 공급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간에, 국가 재정 정책의 적극적인 개입은 화폐의 역사에서 꾸준히 나타나는 주제로, 이를 포기하는 것은 미국이나 일본 같은 국가들에 있어 재고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다.

“국가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패너지애는 농담을 던졌다.

패너지애가 생각하는 보다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디지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암호화폐와 완전히 다른 특징을 가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전세계적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CBDC는 지폐보다 더욱 강력한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을 수 있으며, 이는 비평가들에게는 우려스럽지만 중국과 미국 같은 현재의 강국들에게는 매력적인 요소다.

CBDC가 가진 더욱 매력적인 가능성은 여러 가지 통화들로 구성된 디지털 합성 통화(digital synthetic currency)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 무역 및 통화를 안정화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마크 카니(Mark Carney) 전 영국은행 총재가 내세운 ‘합성 패권 통화(synthetic hegemonic currency)’ 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스템은 상당히 큰 의의를 가지겠지만, 비트코인을 적용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출처=Emily Morter/Unsplash
출처=Emily Morter/Unsplash

최종 결과

그렇다면 결국 달러의 가장 큰 라이벌은 무엇인가?

짧게 답하면 바로 유로다. 유로는 이미 달러 다음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탄탄한 은행 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통합은 느리지만 진행되고 있으며, 유럽중앙은행은 손쉽게 유로존 채권을 추가 발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중국이 작금의 실행 불가능한 균형 정책과 자국의 경제 우선순위를 제쳐두고 위안화의 대외 유출을 허용하는 시나리오도 확률이 낮긴 하나 가능한 이야기다. 다시 부활하고 있는 영국 경제에서 파운드 역시 새로운 기축통화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CBDC의 도입은 국제 교역과 계정을 예측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암호화폐는 가장 큰 미지의 영역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2년 전에 2021년에는 비트코인을 통화로 채택한 국가가 단 하나라도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엘 살바도르의 움직임은 비록 일시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많은 국가들에게 비트코인의 법정화폐 채택이라는 선택지를 제공해 주었고, 적어도 몇몇 국가는 수 년 안에 유사한 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암호화폐의 개발과 수용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망을 예측하기가 불가능하다. 세계를 주도하는 지정학적 세력들은 국가 이외의 주체가 발행하는 중립 화폐의 역할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과연 중국과 미국 같은 경제대국들이 중립 화폐의 성장을 용인할 것인가? 혹은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옥죌 것인가?

영어기사: 김예린 번역, 임준혁 코인데스크 코리아 편집

관련기사

제보, 보도자료는 contact@coindeskkorea.com
저작권자 © 코인데스크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