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Unsplash/Tom Hauk
출처=Unsplash/Tom Hauk

용기

"한국 사람들은 '뭘 하기에 늦었다'는 말을 너무 많이, 가혹하게 해요.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어떤 일이라도 시작하기에 늦은 일은 없지 않을까요?"

지난 7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는 지난 1월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나 역시 가상자산 업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허 교수가 말한 '한국 사람들'에 속했다. 몇 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몇 살까지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해서, 몇 살까지 돈을 얼마까지 모으지 않으면, 사회의 기준선에서 낙오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17년 내 첫 직장을 가상자산 업계로 정한 것은 나에게 있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 가상자산 업계는 지금보다 훨씬 불확실성이 많은 곳이었다. 곧, 가상자산 업계에 취직한다는 것은 안정적인 직장·수입과는 안녕을 고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걸 알면서도 가능성·재미·희망·열정과 같은 추상적 가치에 이끌려 모험을 택했다.

큰 결심을 하고 가상자산 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뒤에도 불확실성은 언제나 나와 함께했다.

 

-기존 월급 체계도 없고 법인도 없는 작은 다오(DAO, 탈중앙화자율조직) 콘텐츠 제작 팀의 운영자로서 나는 이 조직에 유의미한 수익을 창출하고 지속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2018년 이후 계속되는 하락장 속에서 한 가상자산 프로젝트의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업계 관계자들의 '탈블' 러시와 산업 자체가 흔들리는 불안함 속에서 난 어떤 길을 걸어야 옳은 걸까.

-기자 경력 한 줄 없었던 내가 독자에게 누가 되지 않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을까.

-재미하고는 거리가 멀고 내향적인 내가 유튜브라는 콘텐츠 플랫폼을 소화할 수 있을까.

-가상자산이라는 콘텐츠를 유료화했을 때 과연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이 생길 때마다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용기였다. 물론 용기를 내서 내딛은 발걸음이 실패로 이어질 때도 많았다. 몸담았던 다오의 운영을 맡으면서 잠시 유의미한 수익을 창출하기는 했지만, 조직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지는 못했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했을 당시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는 지금 서비스를 내놓으면 사기 치는 것밖에 안된다는 이유로 공개하지도 못했다. 결국 그대로 사업이 종료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런 실패가 누적될 때마다 몇 살까지 어떤 커리어를 완성하고 돈은 얼마를 모은다는 목표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러나 가상자산 기자 일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앙꼬 없는 성공보다는 용기 있는 실패가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때가 많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가상자산 업계를 취재하다 보면 이른 나이에 많은 돈을 모은 취재원을 만날 때가 많은데, 요행으로 돈을 번 사람은 그 돈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행으로 돈을 벌었으니, 직접 과제에 부딪혀야만 얻을 수 있는 스킬과 사람도 따라오지 않는다.

반대로 실패를 하더라도 프로덕트를 최대한 직접 만져보고 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면, 당장의 성과가 늦어져도 실패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사람과 스킬을 바탕으로 더 나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뭘 하기에 늦었다"는 근심을 가지기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진심으로 하느냐"에 대한 용기를 먼저 생각하게 된 점은 내가 지난 5년간 가상자산 시장을 겪으면서 얻은 큰 수확 가운데 하나다.

 

겸손

"가상자산 시장은 위로도 말이 안되는 일이 일어나지만, 아래로도 말이 안되는 일이 일어나요."

지난해 말 하락장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한 취재원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의 말처럼 가상자산 시장은 위로든 아래로든 예상 밖의 일이 자주 일어난다.

내가 가상자산 시장에 막 진입했던 2017년에는 '거래소=폴로닉스'라는 공식이 통할 정도로 폴로닉스의 시대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몇 달도 못 가서 비트렉스로 주도권이 넘어갔고, 비트렉스도 얼마 못 가 여러 거래소에 패권을 넘겨줬다.

개별 가상자산도 마찬가지였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지금은 지위를 비교적 공고히 하고 있지만, 2017년에는 비트코인이 하드포크 이슈로 망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비슷한 시기 이더리움도 이오스와 같은 새로운 메인넷 서비스에 위협을 받았다. 나머지 알트코인의 경우에는 다른 시장의 비주류 자산보다 짧은 주기로 흥망성쇠가 반복됐다. 이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올해 5월에 터진 테라·루나 사태도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루나 프로젝트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조차 '그렇게 한순간에 급격히' 몰락할 것이라고는 전망하지 않았다. 그 전의 확장세가 워낙 좋았고, 한순간에 망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게 상식적일 정도로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상황을 단정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일들이 자주 발생하며, 다른 시장 대비 가변성이 크다. 이 시장은 지나친 확신은 용기가 아닌 오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며, 끊임없는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지난 5년간 가상자산 시장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겸손을 배우게 된 까닭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앞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몇 번은 더 터지고 단단해져야 가상자산 업계가 대중화라는 단어를 보다 쉽게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

무엇보다 지난 5년간 배운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감사함이었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큰 가상자산 시장에서 오랜 기간 남아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상자산 시장이 아니어도 해당되는 얘기기는 하지만, 변수가 많은 가상자산 시장이기 때문에 더욱 노력으로만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첫째로 여태까지 가치관이 흔들리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점에 대해 감사하다. 아무리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려고 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면 더 이상 도전을 하기 어렵다. 나에게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 않았고, 어려운 순간에는 늘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또한 아무리 겸손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도 연속적인 성공에 도취되면, 겸손을 잃기 쉽다. 지난 5년간을 돌이켜보면 나는 적당한 선에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은 것 같다. 기왕이면 성공가도만 달리는 게 좋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겸손을 마음 한 켠에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

둘째로 이른 나이에 재밌는 일을 찾았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 평범한 한국 직장인 기준으로 평일에 적어도 8시간은 일을 해야 한다. 평일 하루 1/3 이상은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재밌어하는 일을 쉽게 찾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것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취미가 아닌 일이다 보니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항상 뒤따라오긴 하지만, 나는 지난 5년간 슬럼프를 겪거나 일이 재미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여태까지 경험한 가상자산 시장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5년간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려운 순간에 용기를 내고, 매사에 겸손하며, 주변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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